열린마당

[민족·화해·일치] 위기 / 손서정

손서정 (베아트릭스) 평화활동가
입력일 2018-03-13 수정일 2018-03-13 발행일 2018-03-18 제 3086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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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였다. 쌀쌀한 날씨에 모자가 달린 도톰한 재킷을 입고 서울역 근처의 학원에 가는 길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출구로 나가는데 맞은편에서 오던 한 젊은 남자의 눈길이 느껴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옆을 스치며 나의 한쪽 가슴을 손으로 살짝 움켜쥐고 지나갔다. 너무 당황하고 놀랐다. 경찰을 불러야 하나, 소리를 지르나 하며 머리가 뒤엉켜 경황이 없던 중에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흉측한 웃음을 지으며 뒤돌아 사라졌다.

내 생애에 생긴 한 사건이었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일을 겪은 후에 어떻게 대처하고 이겨내느냐이다. 순수함에 더해진 수치심 때문에 당시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 후, 한참 동안 얼마나 끔찍했는지 모른다. 그저 지나쳐간 장난이나 실수라고 변명하는 그런 행위가 한 인간의 영혼과 생명을 파 헤집어 심각하게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을 과연 모르는 것일까.

‘미투 운동’이 한창이다. 심각한 폭행에다 경미한 성추행까지 포함한다면 대한민국에 사는 어떤 여성을 붙잡고 물어봐도 이에 대해 쏟아낼 거리가 한 사발 가득 차고도 넘칠 것이다. 그 정도쯤이야 하고 넘어갔던 부분을 누구의 시각에서 경미한 것으로 규정지었는지, 그렇게 묵인하면서 얼마나 많은 부분을 덮어서 은밀하게 키워왔는지 면밀히 성찰해 볼 문제다.

우리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장 힘이 들 때 찾게 되고, 온전한 믿음으로 바라보았던 교회가 무너짐을 바라보았을 때 신자들과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성찰하고 노력하는 일꾼들은 가슴 저린 아픔과 슬픔을 느낀다. 개개인의 일거수를 일반화시키는 오류는 당연히 없어야 하지만, 위기에 처했을 때 대표성을 가진 한국교회가 대응하는 방식은 모든 신자의 삶에 방향을 제시하고 교회 밖에서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바라보던 비신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주님께서는 고통으로 우리의 마음을 꺾어 겸손하게 하시고, 그렇게 나를 다 비운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다시 찾을 때에 비로소 캄캄한 곳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신다. 가장 위기의 순간이 다시 첫 마음으로 시작해 옳은 길로 걸어갈 수 있는 기회의 때인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 시점의 대한민국은 온전한 기회로 가득 차 있다. 존경받던 각계각층 인사들의 오류가 드러나면서 기본적인 도덕과 가치를 되짚어 보고 있다.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야 비로소 남과 북은 만나기 시작했고 김정은 위원장 집권 이후 처음으로 대화의 물꼬를 텄다. 숨어서 잠자코 있어야 했던 약하고 억압받는 이들이 하나씩 고개를 들어 땅 밖으로 나오면서, 또 다른 이들도 나올 수 있도록 격려하는 새로운 숨구멍이 뻥뻥 뚫리고 있다.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의 편에 계셨던 예수님의 죽음이 부활로 깨어나는 순간을 고대하는 이 사순 시기가 나와 우리 교회, 그리고 한반도에도 부활의 기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손서정 (베아트릭스) 평화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