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호남 복음화의 전초기지… 대구 첫 본당 한옥성당 재현한다
200여 년 전 경상도 지역 전교 전초기지로 자리매김했던 신나무골 성지(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 소재)가 지난달 말 새단장 공사에 들어갔다.
1901년 화재로 소실된 대구본당(현재 계산주교좌본당) 한옥성당을 첫 본당 자리에 재현하고 로베르 신부와 보두네 신부 등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제들이 머물던 사제관을 복원해 영호남 교회의 초석이 된 발자취를 재조명한다는 계획이다. 신나무골 성지 3차 개발을 시작하며 신나무골 성지의 역사와 의미를 돌아본다. ■ 영호남 교회 초석 된 ‘신나무골 성지’ 예부터 단풍나무의 한 종류인 ‘신나무’가 많이 자라 신나무골이라 불린 이곳은 교통의 요지였다. 대구 외곽에 자리했지만 읍성을 하루거리로 다닐 수 있었고, 인접한 낙동강을 이용하면 쉽게 이동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진 곳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이유로 신나무골에는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신나무골에는 많은 신자들이 함께 모여 신앙생활을 했던 것으로도 알려진다.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로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샤스탕 신부와 ‘땀의 증거자’ 가경자 최양업 신부도 신나무골을 찾아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한 기록이 있다. 관아의 눈을 피해 지내야만 했던 신자들에게 신나무골은 특별했다. 산골이 깊어 피신하기 적당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1815년 을해박해와 1827년 정해박해 등 계속된 박해에 많은 신자들이 대구 감영으로 압송되자, 그들의 가족들이 대구 읍성과 멀지 않은 신나무골에서 지내며 옥바라지를 했다. 1882년 경상도 지방의 선교 책임을 맡은 로베르 신부(Achille Paul Robert·한국명 김보록·1853~1922)도 대구와 인근의 신자들을 찾을 때면 신나무골에 며칠 머물면서 성사를 집전하고 인근 교우촌 신자들을 돌봤다. 경상도 전역과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전라도 일부를 순회하며 전교했던 로베르 신부는 1885년 신나무골에 사제관을 마련하고 대구본당(현재 계산주교좌본당)을 세운다. 대구 읍성을 비롯해 경상도 전역을 관할하는 전교 전초기지를 마련한 것이다. 선교사들에게 신나무골은 대구 읍성 신자들을 돌보고, 전교를 위해 영호남 각지로 나갈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지리적으로 대구 읍내에서 김천과 상주를 거쳐 문경새재로 가는 대로변에 있었고, 인접한 낙동강에서 배를 타면 경상도 북부지역은 물론이고 부산과 경남지방, 경상도 전역으로 전교를 다닐 수 있는 특징이 있었다. 1888년 로베르 신부가 대구본당을 새방골(대구 상리동)로 옮기며 본격적인 대구 읍성 전교에 나서자, 보두네 신부(Francois Xavier Baudounet·한국명 윤사물·1859~1915)가 신나무골에 부임했다. 보두네 신부는 신나무골에서 지내며 조선말과 풍습을 배우고 전주로 떠나, 1889년 전주본당(현재 전동본당)을 세운다. 후임 죠조 신부(Moyse Jozeau·한국명 조득하·1866~1894)도 신나무골에서 1년간 지내며 부산 지역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죠조 신부는 1889년 부산본당(현재 범일본당)을 설립했다. 이밖에도 파이야스 가밀로 신부(Camillus Cyprien Pailhasse·한국명 하경조·1868~1903)는 신나무골에서 지내다 왜관에 가실본당을 세우고 성주, 선산, 문경, 상주, 군위, 안동 등 경상도 북서부 일대와 충청도 황간, 전라도 무주 등을 돌며 신자들을 돌보고 전교에 힘썼다.박원희 기자 petersco@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