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십자가의 길’ 걸으며 영혼의 정화를 / 사순 제3주일

김창선 (요한세례자)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
입력일 2018-02-26 수정일 2018-02-27 발행일 2018-03-04 제 3084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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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3주일(제1독서 : 탈출 20,1-17  제2독서 : 1코린 1,22-25  복음 : 요한 2,13-25)
십계명은 사랑과 생명의 길
죄 성찰하고 마음 깊이 새겨야

‘재의 수요일’에 머리에 재를 얹으며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고, 단식과 기도와 자선으로 참회하는 사순 시기는 이제 제3주일을 맞습니다. 오늘 말씀의 전례를 통해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삶의 기준으로 계시하신 사랑의 십계명,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면서 주님께서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영혼을 깨워주시기를 삼가 청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이 400년간 종살이하던 이집트 땅에서 탈출하여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파스카 축제는 전례를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집트 가정의 모든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를 멸하실 때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가정은 그냥 지나가게 하셨고, 갈라진 홍해바다를 건넌 그들은 하느님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유일신인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계시하신 십계명은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인간이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고 자유와 책임을 다하겠다는 하느님과의 약속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탈출 20,2-17)이 바로 그 십계명입니다. 이는 하느님과 그 백성 간에 맺어진 계약의 핵심이고 그리스도교의 윤리적 기초입니다. 이 계명을 지키는 거룩한 백성에게는 그분께서 영원히 자애를 베푸십니다.

“한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사람을 죽이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을 하지마라. 거짓증언을 하지 마라.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청년 시절, 하느님 자녀가 되기 전 교리문답에 합격하고자 이를 열 마디로 줄여 ‘한하주부사간도거남남’으로 암기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구약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 모세를 통해 주어진 이 율법을 ‘사랑의 정신’으로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처음 셋은 하느님 사랑이고, 다른 일곱은 이웃 사랑에 관한 것으로,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속에 심어주신 법이기도 합니다. 이 계시의 말씀이 하느님 흠숭, 주일의 의무, 가족사랑, 생명존중, 성의 윤리, 인격존중, 소유권 존중을 위한 ‘사랑의 계명’이요 ‘생명의 길’임을 제대로 깨닫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답니다.

복음 말씀(요한 2,13-25)을 통해 파스카 축제를 앞두고 예루살렘을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를 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야코프 요르단스의 ‘예수의 성전 정화’.

예루살렘의 성전은 모든 유다인들에게는 유일한 성전이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 가운데 현존하시는 표징이요, 유다이즘의 중심이었기에 예수님의 성전 정화사건은 ‘역사적 사건’입니다. 공관복음사가들(마태 21,12-13; 마르 11,15-19 루카 19,45-48)은 다같이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인데,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들은 이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후 수난 직전에 기록하여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 짓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분노하여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며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정당성의 문제를 따집니다. 19세 이상의 유다인들이 성전에 들어갈 때는 세금을 납부해야 했습니다. 로마 은화(데나리온)와 그리스 은화(드라크마)는 성전에서 받아주지 않았기에 헤로데가 만든 동전이나 티로의 동전으로 환전해야만 했고, 제물로 봉헌하는 동물의 조달 서비스가 필요했던 사업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 정화사건을 살펴보면 이방인도 출입이 가능했던 성전의 서비스와 관련해 기득권을 누리던 세력들에게 어떤 이권과 악습이 있었음이 짐작됩니다. 당시 군중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탄하여 두려워했음(마르 11,18)에 비추어볼 때 예수님이 하신 일은 일찍이 예언자가 말한 성전을 ‘기도의 집’(이사 56,7; 예레 7,11)으로 쇄신하려는 메시아의 표징으로 받아들였다고 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들이 이해할 리 없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헤로데 대왕이 유다인의 호감을 사기 위하여 기원전 20년경에 시작하여 유다전쟁으로 성전이 파괴(70년)되기 수년 전에 완공한 건물이었습니다. 제자들과 복음사가들도 예수님께서 “성전이라 하심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사흘째 부활하시어 세워진 공동체(요한 2,21; 묵시 21,2; 호세 6,2)를 두고 하신 말씀임을 부활하신 후에야 분명하게 깨닫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많은 유다인들이 그분의 이름을 믿었지만 기적에 매료되어 믿은 그들을 주님은 신뢰하지 않으셨습니다.(요한 2,24) 바오로 사도가 말(1코린 1,22-25)했듯이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힘이요 지혜’임을 선포합니다. 그분은 십자가상에서도 원수들의 죄를 용서하며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돈과 물질이 우상인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십니까?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는 ‘하느님의 집’인 성전입니다. 그분의 몸인 성체를 모시는 하느님 백성들의 몸은 바로 성전입니다. 평신도에게 교회는 성전이며, 사제들에게는 지성소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공동체를 성령께서 거처하시는 성전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성령의 성전입니다.(1코린 6,19)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모시는 내 안의 성전은 주님 보시기에 ‘기도하는 집’이 아닌 ‘장사하는 집’은 아닌지를 회심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조차 버리고 십자가상에서 원수를 사랑하신 그리스도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여 침묵과 고통 속에 끌려가신 그 길이 ‘사랑의 길’이요 ‘인간성 회복의 길’임을 가슴 깊이 새깁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나 중심’으로 살아오면서 지은 지난날의 죄를 성찰하고, 사랑의 계명을 마음 깊이 새기며 영혼을 정화하는데 삼가 주님의 도움을 청합니다.

김창선 (요한세례자)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