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제주 4·3 70주년’ 학술 심포지엄

서상덕 기자 sang@catimes.krrn정다빈
입력일 2018-02-26 수정일 2018-02-26 발행일 2018-03-04 제 3084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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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비극적 역사 넘어 시대적 의미 발견해야” 
주교회의 정평위·민화위·제주교구 4·3 70주년 특별위원회
‘희생 속에 핀 제주 4·3, 화해와 상생으로- 죽음에서 부활로’
해방 직후 친일 경찰력 탄압 지속된 미 군정시대 
민족 독립·인간 존엄 수호 향한 염원이 동력으로
용서와 관용 필요하지만 강요할 수 있는 것 아냐

제주 4·3 70주년을 맞아 제주 4·3 70주년 특별위원회 등이 2월 22일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 꼬스트홀에서 연 학술 심포지엄 장면. 이날 행사에서는 그리스도인의 눈으로 제주 4·3을 재해석해내는 다양한 논의가 이뤄져 큰 관심을 모았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경험한 세계적인 석학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iesengrund Adorno, 1903. 9. 11.~1969. 8. 6.)는 독일 나치가 유다인을 대량 학살한 ‘아우슈비츠(Auschwitz) 학살’을 두고 “상상도 할 수 없는 것 이상의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떤 것”(Something unthinkable beyond the unthinkable)이라고 했다.

전체 인구의 10%가 넘는 도민들이 무차별 학살된 역사적 비극으로 점철된 ‘제주 4·3’은 ‘아우슈비츠 이후의 아우슈비츠’라고 불린다.

그러나 ‘아우슈비츠 학살’과 ‘제주 4·3’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전자가 다양한 이름으로 기억됨으로써 인류 발전에 밑거름이 되고 있는데 반해, 후자는 뇌리에서 지워져야 할 역사로만 남아왔다. 이 때문에 ‘제주 4·3’ 은 70년이 흐른 지금까지 제 이름조차 지니지 못하고 있다.

‘그 일’이 일어난 지 꼭 70주년을 맞는 오늘날 주님께서는 ‘제주 4·3’을 통해 무슨 목소리를 들려주고 계신지 돌아보는 장이 마련됐다.

제주 4·3 70주년을 맞아 ‘제주 4·3의 역사적 진실과 한국현대사에서의 의미’를 짚는 학술 심포지엄이 2월 22일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 꼬스트홀에서 열렸다.

‘희생 속에 핀 제주 4·3, 화해와 상생으로-제주 4·3 죽음에서 부활로’를 슬로건으로 제주 4·3 70주년 특별위원회가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민족화해위원회와 함께 마련한 행사는 역사 속에서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주님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장이었다.

기조강연을 하고 있는 강우일 주교.

■ 강우일 주교 기조강연

기조강연에 나선 강우일 주교(제주교구장)는 ‘제주 4·3’(이하 4·3)을 역사적 맥락을 바탕으로 사회적·신학적 접근 등을 통해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 해냈다.

강 주교는 ‘4·3의 통합적 의미를 찾아서’를 주제로 한 발표에서 ‘4·3’의 의미를 성서적 전승에 비추어 성찰했다.

그는 “4·3을 단순히 한국현대사에서 일어난 일시적인 비극으로 보고, 그에 대한 시시비비를 논하고 사회적 책임 규명을 하는데 그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진단했다. 나아가 “이제는 4·3 안에서 민족의 삶의 궤적 속에 숨겨진 더 깊은 내면적 가치와의 연결고리를 발견하는 단계로 진입해야 한다”고 밝혔다.

강 주교는 일본 제국주의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일본에 살던 많은 조선인들이 짧은 기간 안에 대거 한반도로 귀향한 시대적 배경에서 ‘4·3’의 역사적 맥락을 풀어냈다.

해방 이후 1945년부터 1947년 사이 일본에서 제주도로 귀향한 교민만 7만 명에 달했다. 실제 1944년과 1946년 제주도 인구 변동을 비교하면, 21만9500여 명에서 27만6100여 명으로 5만6600여 명의 인구가 단기간에 유입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대부분은 일본에서 귀국한 이들이었다.

일본의 패전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온 제주 출신 교민들은 한반도에서 계속 살았던 이들보다 훨씬 더 강한 민족의식과 조국 국권 회복에 대한 큰 소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미 군정의 정책 부재와 실책으로 인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혼란뿐이었다. 더 참기 힘든 모순적 현실은 미 군정이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관헌으로 동포를 압박하고 수탈하는데 앞장섰던 조선인 경찰들을 미 군정의 경찰력과 행정요원으로 다시 등용했다는 사실이다.

높은 항일의식과 새 조국 건설의 여망을 안고 일본에서 돌아온 귀향민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높은 비율을 차지한 제주 지역에서 주민들은 미군이라는 새로운 외세의 등장에 새 시대를 향한 희망보다는 일제의 연장이라는 의심과 배신감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가운데 1948년 4월 3일 일어난 무장 봉기는 수백 명 수준의 남로당 제주도당 당원들이 결행한 사건이었으나, 그 배경과 과정에는 제주도민 전체, 한국인 전체가 염원했던 민족의 독립과 해방, 사회 구조악과 불의에 대한 저항, 인간의 기본적 존엄과 자유와 권리를 향한 장구한 역사의 동력이 작동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강 주교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성서 전승에 드러난 주님의 구원 역사로 승화시켰다.

그는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련과 고통을 살아내면서 보잘 것 없는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그들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빛나는 모상과 영광을 발견해 나갔다”고 말했다. 이어 “고난의 역사는 인간 안에 하느님의 존엄과 위엄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강조했다.

나아가 “4·3은 결코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고가 아니었다. 민족의 해방, 인간의 기본적 존엄과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모든 종류의 사회악과 불의로부터의 인간 해방을 추구하는 도도한 역사의 에너지가 힘차게 분출되는 가운데, 이러한 역사적 동력을 멈추고 저지하려는 부정적인 반작용으로 인해 많은 생명이 희생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 발제 주요 내용

이어진 제1발제와 토론은 ‘‘제주 4·3 모델’의 전국화, 세계화, 보편화’를 주제로 진행됐다. 발제자 박명림 교수(연세대 정치학과)는 “‘상상할 수 없는 것 이상의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던 비극적 유산을 평화, 인권, 화해, 상생의 모습으로 극복해 온 제주의 역사적 궤적을 ‘제주모델’로 명명해 ‘세계 보편 모델’로 삼자”고 제안했다.

박 교수는 트라우마 극복과 화해를 위한 기존 경로로 뉘른베르크 재판으로 대표되는 사법모델,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원칙의 보복-폭력모델, 캄보디아와 모잠비크처럼 과거의 트라우마를 그대로 방치하는 은폐-방치모델,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선택한 ‘진실·화해 교환 모델’ 등을 소개했다.

그러나 박 교수는 앞선 여러 사례보다 “‘정의를 추구하면서도 관용을 견지하는 제주의 모델’이 가장 앞선 모델로 갈등 극복의 모범이 될 수 있다”며 “폭력이 아니라 용서가 힘이라는 것을, 적대가 아닌 관용이 힘이라는 것을 오늘의 제주가 증거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진 토론에서 백장현 교수(한신대 초빙교수)는 “용서와 관용은 인간이 지향하는 최고의 덕목이지만 외부에서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4·3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로 ‘용서와 관용의 제주모델’을 말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화해를 강요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박찬식 제주학연구센터장은 “4·3은 갈등의 상처를 남겨놓은 채 미봉됐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둘러싼 이념 대립 구도는 여전하다”고 평가했다. 이어 “앞으로의 4·3 논의와 인식은 폭동·항쟁의 이념 대립 구도를 넘어 남남화합과 남북통일의 따뜻한 미래를 제시하는 ‘제3의 길’로 발전해 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제1발제가 화해와 상생에 이르는 ‘제주 4·3 모델’을 논의하는 시간이었다면 제2발제는 4·3의 역사적·철학적 의미를 되새기는 자리였다.

김상봉 교수(전남대 철학과)는 ‘의인은 없으니, 한 사람도 없으며’(로마 3,10) 라는 제목의 제2발제를 통해 “4·3은 경찰의 학살과 고문에 맞서 일어난 항쟁이었으나, 더 큰 학살과 더 잔혹한 고문을 낳았던 배반당한 항쟁이었다”면서 “4·3은 분단을 비추는 거울, 갈라진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며 우리는 이 거울 앞에 다시 겸손하게 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진 토론에서 한재호 신부(광주가톨릭대학교 성서신학 교수)는 “이념적 패러다임의 극복이 양비론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고 “양 진영의 대립이 상호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국가 권력과 집단 무력의 대립이었던 만큼 행위의 주체에 따라 다른 차원에서 바라볼 여지는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상덕 기자 sang@catimes.krrn정다빈 수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