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민족·화해·일치] 유혹 / 손서정

손서정(베아트릭스) 평화활동가
입력일 2018-02-26 수정일 2018-02-26 발행일 2018-03-04 제 3084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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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사순 시기가 되면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 때까지 부분적인 단식을 시도했다. 다른 면에선 그나마 대충이라도 지키는 것 같은데, 맛난 음식의 유혹에는 절제를 잘 못하는 듯 느껴져 선택한 방법이다. 처음에는 아일랜드 친구가 하던 방식을 따라 내가 좋아하는 초콜릿을 끊어보았고, 그 이후에는 저녁단식 등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오후 5시 이후 단식과 함께 달콤한 케이크에 흠뻑 빠져있는 나를 자제하기로 결심했다. 올해 사순은 다른 해보다 유난히 일찍 시작돼 우리민족 최고의 명절인 설날과 겹쳤다. 명절은 단식에서 제외되는데 괜히 유난 떤다며 말리는 부모님부터 절실한 가톨릭 집안 출신의 제부까지도 설날 저녁의 흥겨운 만찬에 함께하기를 권유했다.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고, 당연히 융통성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 번쯤, 하루쯤 어떠랴하는 마음으로 결심에 작은 금을 내면, 그 금이 점점 뻗어나가 결국엔 전체가 쩍 갈라져 버릴 것을, 그리고 금이 간 틈을 메울 수 있을 만큼 내가 단단하지도 못하다는 것을 잘 알기에 아직까지는 나의 결심을 지켜가고 있다.

예수님께서 광야 한가운데서 유혹을 받았을 때를 떠올려 본다. 악마는 배고픔에 맛난 빵을, 그리고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세상의 지배를 제시한다. 우리에게 유혹은 가장 필요한 시점과 지점에서 종종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와서 미처 유혹인지도 알아채지 못하게 스며들어 굴복하게 만든다.

일제강점기와 여러 전쟁을 통해 뼈아픈 고통을 겪은 우리민족은 굶주림과 피폐된 자존심을 극복하려 온갖 노력을 통해 이제 끼니걱정은 면했고, 다양한 맛집과 진미를 선택할 수도 있게 됐다. 하지만 옆에는 기본생계를 위해 하루 종일 모아도 커피 한 잔 값이 안 되는 폐지를 모으는 어르신이 계시고, 성장을 위한 영양소를 충분히 섭취할 수 없는 아이들이 북녘에 있다. 또한 아무리 공부하고 일해도 이상적인 세상으로의 진입을 가로막는 유리천장이 있다.

이를 개개인의 잘못과 게으름, 특정 체제 비판으로 몰고 가는 편협한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역사 속에서 우리는 배고플 때 던져주는 빵을 받기 위해 지켜내야 할 가치를 버렸고, 세상에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계명을 어기는 죄임에도 불구하고 회피하며 유혹에 편승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당연히 지켜야 함을 확신하면서 살인을 위한 도구인 무기를 만들고, 평화를 위해 무기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남북한이 무기개발과 구입에 퍼부은 액수는 상상을 초월한다. 이는 우리의 밥상에 맛난 반찬 하나를 더 올려놓을 수 있느냐, 아니면 내일은 밥상을 차릴 필요조차 없게 되느냐와 연관된다.

명확하게 드러나는 모순과 유혹을 묵인하는 순간, 우리의 선택이 한 세기 아니 영원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무엇이 유혹인지 알아챌 수 있고, 단호하게 유혹에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힘,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여정인 듯하다.

손서정(베아트릭스) 평화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