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고통스러운 예수님을 우리가 도울 수 있습니다 / 사순 제2주일

장재봉 신부(부산교구 선교사목국장)rn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윤리신학 박사를 취득하고 부
입력일 2018-02-20 수정일 2018-02-21 발행일 2018-02-25 제 3083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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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2주일(제1독서 : 창세 22,1-2.9ㄱ.10-13.15-18   제2독서 : 로마 8,31ㄴ-34   복음 : 마르 9,2-10)
세상에 맞서 강한 믿음으로 당당히 하느님의 뜻 전해야

오늘 복음은 새겨 읽을수록 다양한 의미를 찾게 됩니다. 이럴 때 오히려 강론준비가 힘들어지는데요. 어느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게 나을지, 결정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의 변모산 사건을 그날 직접 목격했던 제자인 요한은 이 일에 관해서 침묵하는데, 직접 체험하지 못했던 타 복음사가들이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어쩌면 주님께서는 그날 그 자리에서 당신의 영광된 모습을 목격하지 못했던 제자들에게 이 기록을 남기게 하심으로써 ‘보지 않고 믿는 자’의 축복을 깨닫도록 배려하신 것이라 짚어지는 겁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데에는 굳이 특별한 기적체험이 없어도 무방하다는 걸, 일러주신 것이라 싶은 겁니다. 그날 그 자리에서 주님의 변모된 모습을 직접 뵙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굳게 믿고 증언했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얼마든지, 주님을 증거하고 선포할 수 있다는 걸 넌지시 깨우쳐주신 것만 같은 겁니다. 물론 믿음의 대선배이며 주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갈바리아의 고통을 외면한 채, 영광만을 추앙하는 모습을 살피는 것도 강론으로 안성맞춤이라 생각되는데요. 극기와 희생을 통해서 이르는 영광을 이해하지 못한 채, 하느님께서 가져오신 영광만을 공짜로 누리려는 우리의 속내를 살피도록 할 테니 말입니다.

때문에 고민하며 내용을 선택했습니다. 그날 예수님 곁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두 인물의 삶이 제 마음에 크게 다가왔던 까닭입니다. 우선 세 분 모두가, 이 땅에 무덤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라, 땅에 살았으나 죽은 흔적을 땅에 남기지 않으신 세 분의 공통점이 마음을 후볐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그날 눈부시게 변화되신 예수님과 함께 자리했던 두 분, 바로 모세와 엘리야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기구한 운명을 살아냈다는 사실에 집중하여 우리 믿음을 단단히 하도록 권하고 싶은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승천 이야기를 모르시는 분은 없으실 테지요. 수백 명의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오르셨다는 건 너무나 유명한 일화이니까요. 그러니 예수님의 무덤이 땅에 있을 턱이 없는 건 당연지사입니다. 한편 엘리야 예언자가 하늘에서 내려온 불 병거에 실려서 감쪽같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사실은 엘리사 예언자의 증언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모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모세를 땅에서 무덤을 찾을 수 없는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으니까요. “모압 땅 벳 프호르 맞은쪽 골짜기에 묻힌”(신명 34,6) 모세의 무덤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기록에서 우리는 모세의 무덤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도 긴가민가하는 사람이 많았던 까닭일까요? 주님의 제자였던 유다의 증언이 더 보태집니다. 유다서에 모세의 주검을 놓고 대천사 미카엘과 사탄이 다투었다는 기록에서 모세의 육신이 온전히 하늘로 ‘들림’ 받아 무덤이 없다는 걸 추리하게 하는 귀띔이라 믿습니다.

프라 안젤리코의 ‘그리스도의 변모’.

그래서 감히 짐작해 봅니다. 그날 하느님께서 굳이 모세와 엘리야를 선택하시어 예수님과 함께 하도록 한 이유가 무엇일지? 그날 하느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를 보내시며 신신당부를 하시지는 않았을지? 너무나 고통스럽게 끔찍한 죽음을 맞이할 당신의 외아들을 위해서, 힘을 주고 격려해 줄 것을 청하고 또 청하며 눈시울이 붉어지시진 않았을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뭅니다. 당신과 얼굴을 마주 보며 얘기를 나누었던 특별한 모세의 삶도, 죽음을 맛보지 않도록 불 병거를 내려 보내실 만큼 귀하고 귀했던 엘리야의 삶이 얼마나 엄청난 고난의 연속이었는지를 기억하라는 의미라 짚어집니다.

사실 세상에서 그분들만큼 기구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다시 또 없을 듯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 갖은 역경을 꿋꿋이 살아냈던 모세,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을 되돌리기 위해서 자신의 온 것을 걸고 투쟁했던 엘리야……. 그럼에도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비천해지기를 마다치 않고 마침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아들의 삶에는 결코 미치지 못합니다. 우리 역시 어떤 상황에도 불만할 수 없다는 걸, 억울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믿음조차 오락가락 변덕을 부리는 우리 삶이 너무 부끄러워집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로 바칠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라고 고백하며 스스로 당신의 말씀을 철회하시는 분이십니다. 오직 순명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감격하시는 분이십니다. 온전한 믿음의 모습이 너무 귀해서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고 다짐하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은 죽임을 당하도록 버려두십니다. 바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바로 죄에 물든 나에게 새 생명의 길을 선물하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제물로 삼으십니다. 참혹하게 죽어가는 아들을 그저, 바라보십니다.

사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어떤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실까요? 아브라함처럼 가장 소중한 것, 그 전부가 하느님의 것임을 고백하여 봉헌하는 우리 모습이 아닐까요? 모세처럼 세상에게 짓눌려 강물에 내던져지는 멸시를 당하더라도 끝내 하느님을 잊지 않고 지내는 우리 모습이 아닐까요? 엘리야 예언자처럼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믿음으로 세상에 맞서며 당당하게 주님의 뜻을 전하는 우리 모습이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도 꼭 아브라함에게 들려주신 그 축복의 말씀을 들려주고 싶어 하지 않으실까요?

그날 예수님께서는 깜짝 쇼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타보르산에서 보여주신 영광의 모습은 예수님의 실상이십니다. 그날 하루 잠시 잠깐 변모하신 것이 아니라, 숨길 수 없는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 보이셨던 것뿐입니다. 세상에서의 삶을 끝내고 영원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날, 우리에게서 드러날 하느님 자녀의 참모습을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당신의 자녀들은 모두 하느님을 닮아 영광스럽게 빛날 것이라는 진리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진실로 십자가의 고난 후에 도래할 영광을 믿으며 생활하는지? 참으로 그 진리를 깨달아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는 사순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픈 시선을 느껴야 합니다. 아직 미련을 둔 그것, 아직 감추려는 바로 그것을 슬프게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에 온 마음이 찔리고 영혼이 뜨끔해져야 합니다. 짧고 짧은 땅에서의 영광에 연연하던 마음을 벗어던져야 합니다.

어떤 환경이나 처지를 막론하고 행복하게 복음을 살아내는 우리의 모습이 그날 모세와 엘리야처럼 주님께 힘을 드릴 수 있습니다. 처참하게 고통당하며 죽으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 아브라함처럼 기쁨을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아닌 것에서 확고히 돌아섬으로 모세와 엘리야처럼 주님을 응원하게 되시길 마음 모아, 기도드립니다.

장재봉 신부(부산교구 선교사목국장)rn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윤리신학 박사를 취득하고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