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밀알 하나] 승윤이 손바닥 / 노중호 신부

노중호 신부 (성남대리구 서부본당 주임)
입력일 2018-02-20 수정일 2018-02-20 발행일 2018-02-25 제 3083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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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잘 알고 어떤 것을 잘한다 하여도 제자리일 때, 그리고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을 때, 우리는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런데 이 표현이 자칫 교만으로 악용해서 쓸 수 있습니다. 부모님께서 자녀들을 사랑이 아니라 구속으로 몰아세울 때 ‘니가 아무리 그래도 내 손바닥 안에 있어’라고 생각하면 큰 과오를 범하게 됩니다. 잘 안다고 여길 때 제일 모를 수도 있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내 손바닥 안에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본당 생활 가운데 아이들을 통해서 다시 새롭게 알고 찾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철부지 아이들처럼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배워갑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승윤이 손바닥에서 하느님 나라를 보았습니다. 시험 볼 때만 쓰는 부정의 의미인 커닝 페이퍼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향한 발걸음에서 참 좋은 커닝 페이퍼가 필요합니다.

제가 서부본당에 처음 왔을 때, 주일미사 참례 신자 수는 150명 정도였습니다. 어른 신부님들께서 예전 본당에선 교우들 집에 숟가락 젓가락 밥그릇 숫자도 다 아셨다는 말씀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전체 주일학교 학생은 2명이었습니다. 2명도 남매여서 이 집안에서 미사를 오지 않으면 주일학교 미사가 어려웠습니다. 그중에 남동생 승윤이는 말이 없고 뚱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가 ‘승윤이 웃기기’라는 시간을 만들 정도로 그늘이 깊은 아이였습니다.

그랬던 승윤이가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고 하느님 안에서 뛰어놀다 보니 저절로 밝아졌습니다. 이제는 미사 복사도 합니다. 한주간은 늘 이끌어 주던 복사 형이 오지 않아서 혼자서 복사를 해야 하는 미사였습니다. 함께 할 때는 형을 따라 하면 됐는데 혼자 하려니 그 자리가 망망대해였습니다. 마침 군 휴가 온 선생님께 손바닥에 복사 움직임을 써 달라고 했습니다. ‘거룩하시도다 꿇어, 주님의 기도 일어나….’ 영성체 시간에 승윤이의 손바닥을 보는 순간 감동이었습니다. 이렇게 노력하는 모습이 제 눈에도 예뻐 보이는데, 예수님 보시기에는 얼마나 황홀하게 예쁘게 보여질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고 봉사를 많이 했고 그래서 알만큼 안다고 여길 때, 다시 승윤이의 손바닥을 생각합니다.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지….’ 그렇게 하느님의 길에서 멀어지는지도 모르게 멀어진 스스로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잊지 않게 잃어버리지 않게 제 마음의 손바닥에 주님의 길을 다시 씁니다.

초등학교 처음 복사할 때 두렵고 떨리던 마음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렇게 조심스레 준비하고 성실하게 맞이합니다. 교우들을 만날 때 한쪽 면만 보고 한쪽 이야기만 듣고 다 아는 것처럼 판단하지 않아야 함을 다시 되새기게 됐습니다. 미사 공지사항 시간에 모든 교우들에게 승윤이의 손바닥을 보여드리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습니다.

노중호 신부 (성남대리구 서부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