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무엇이 나병환자를 이토록 강력하게 움직이게 했는가? / 연중 제6주일

김혜숙(막시마) 선교사
입력일 2018-02-06 수정일 2018-02-06 발행일 2018-02-11 제 3082호 16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2월 11일 연중 제6주일(제1독서 : 레위 13,1-2.44-46   제2독서 : 1코린 10,31-11,1   복음 : 마르 1,40-45)
모든 것 뚫고 나와 예수님 앞에 무릎 꿇은 나환우
깨끗하게 치유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 드러내

장 마리 멜키오르 도즈의 ‘나병 환자를 고치시는 예수님’.

예수님의 치유 행적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 안에 든 마귀와의 대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오늘 복음처럼 몸이 상한 사람에 대한 치유입니다. 이 이야기가 들어있는 마르코 복음 1장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한 주간 선교 일정을 알려줍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고(16-20절), 가르침과 치유(21-28절), 베드로 장모와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기도하기 위해 외딴곳으로 가시고(35절), 다른 지방에도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선교의 보편성을 말씀하신 후에 나병환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시는 이 장면은 인간 예수가 누구인지 깊이 있게 표현된 중요한 내용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하느님께서 어디에 계시는가를 드러내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내가 있습니다. 자, 만나볼까요?

우선 나병환자를 주의 깊게 바라봅시다. 이름이 없습니다. 성서학을 배울 때 기본적으로 알게 되는데, 성경에서 이름이 명기되지 않을 때는 바로 읽는 독자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나병환자의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위치는 참으로 불행했습니다. 제1독서에 나타나듯 그는 사람들이 지나가면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레위 13,45-46; 14,1-32절 참조)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나는 죄인이요, 죄인이요’라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마을 밖에서 머리를 풀고 옷은 찢어 입고 철저하게 혼자 고립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 어느 것에도 참여할 수 없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종교 의식에서도 제외되었습니다. 사회 종교 정치 이 모든 것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이는 한 사람으로서의 인격이 인정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 나병환자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을 뚫고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와 무릎을 꿇고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무엇이 이 나병환자를 이토록 강력하게 움직이게 했을까요? 무엇이 이 나병환자로 하여금 예수님께 향하도록 했을까요? 어떻게 그토록 철저하게 요구되던 율법을 넘어설 수 있었을까요?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이미 그분에 대해, 또 그분의 가르침이 다름을 들었을 것입니다. 자기를 무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무엇인가가 있음을 직감했을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곧바로 용기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자기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의 자세와 고백에서 알 수 있습니다. 꿇어 엎드린 간절한 자세는 자신의 의지가 어디에까지 닿았는지를 보여주었고, 그의 고백은 예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자신은 나을 수 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병들기 전 성한 몸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받아줄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온몸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구습과 악습에 젖어 있다면 희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41절) 예수님께서 마음으로부터 측은한 생각이 들어 접촉이 금지된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십니다. 마음에 일어나는 반응, 곧 그가 낫기를 원하는 바를 행위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한 개인이 직접 예수님께 다가온 최초의 기록으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묵상하게 합니다.

깊이 만나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우선 나병환자도 예수님께서도 ‘고치다’하지 않고 “깨끗하게”라고 하십니다. 이 표현은 육체적 불결함이나 도덕적 종교적 정결에 대해 사용하는 표현입니다.(사도 15,9; 2코린 7,1 참조) 그다음 예수님의 감정을 표현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라는 말을 직역하면 ‘그의 마음에 감동되어’입니다. 인간의 ‘내장’ 곧 ‘사랑’이나 ‘애끊는 마음’, 곧 찢어질 듯한 마음을 뜻합니다. 권위나 책망이 없습니다. 자비의 원천이 사랑이고 그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말할 뿐입니다. 인류를 보시는 하느님의 렌즈는 자비입니다. 자격이 없어도 우리를 자녀로 부르시고 당신의 일을 맡기십니다. 죄라는 질병은 나병보다 무서운 것입니다.

“깨끗하게”는 마음이 순수의 상태로 되돌아옴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되려면 이 치유의 과정을 깊이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만지시는’ 그런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을 들여다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의 갈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이 갈망을 예수님께서 ‘만지시도록’ 해야 합니다. 나병은 더 이상 감각을 느낄 수 없는 병입니다. 살이 부패하고 뼈가 썩는다는 것은 상실, 곧 감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 형제 앞에서 본질적으로 느껴야 하는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감각을 잃게 되는 나병환자 상태가 됩니다.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예수님 앞에 놓고 치유를 청하고 ‘만지시도록’ 해야 합니다.

자신만을 생각하느라 다른 이를 배려할 줄 모르는 나의 잃어버린 감각을 회복해야겠습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병이 번져나가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혼자가 아닌 군중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야겠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신앙하는 이가 아니라 자녀라는 신분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44절과 45절에서 우리는 중요한 단어를 발견합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44절)와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45절)입니다. 언뜻 보면 같은 것 같지만 다릅니다. 말씀은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선포되는 것입니다. 즉 “그가 했다”와 “말씀이 했다”의 차이점을 두고 있습니다. 두 다름이 우리의 삶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인격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인격이 그분의 인격을 선포해야 합니다.

나병환자는 삶의 최고 바닥에서 자신의 절박함을 알고, 굳은 습관(율법)에서 탈출하는 용기를 내어 주님만을 의지하는 겸손의 자세를 갖습니다. 그의 행위는 꺼져가는 자신의 삶에 새로운 생명을 원하는 것입니다. 내면으로부터 아주 절박하게 말입니다. 예수님도 율법을 어기고 그에게 다가갑니다. 그에 대한 연민이 예수님을 움직이도록 한 것입니다. 탈출은 자신을 바라볼 때는 불가능합니다. 자신이 신앙하는 그분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의 탈출이 가능해집니다. 신앙은 내가 믿는 그분을 바라보고 나의 의지를 내려놓을 때 나를 초월하는 신비를 만나게 됩니다. 내 몸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몸에 대한 희망입니다.

오늘 입당송을 부르며 사순 시기를 향해야겠습니다. “하느님,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 죄인의 자리에서 자녀라는 자리로 유산을 회복해야겠습니다. 아버지께 향해 걸어야겠습니다. 자녀라는 유산을 탕진하지 말아야겠습니다.

※ 김혜숙 선교사는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 신학과, 교황청립 안토니오대학 영성학과를 졸업하고, 교황청립 혼인과 가정 연구를 위한 요한 바오로 2세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회원이며, 현재 교황청립 혼인과 가정 연구를 위한 요한 바오로 2세 대학 한국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다.

김혜숙(막시마)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