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밀알 하나] 내적 생활에 대하여 / 박태웅 신부

박태웅 신부 (수원교구 장애인사목위원회 전담)
입력일 2018-01-23 수정일 2018-01-23 발행일 2018-01-28 제 3080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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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쓴 칼럼에 전반적으로 흐르고 있는 맥락이 있다. 모두 ‘나’에 대한 것이다. 당연히 나의 주인은 나(?)이고 궁극적으로 나를 위하여 내가 사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물론 전혀 새롭지 않다. 세상에는 나(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넘쳐난다. 거울을 통해 보고 있는 것이 나일까? 아니면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 나인가? 쉽게 말하기도 어렵다.

함께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나는 내가 하고 있는 많은 것들을 얼마나 의식하고 있으며, 알고 이해하는 가운데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내 생각이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그들이 하는 말 속에 왠지 ‘나’라는 알맹이가 빠져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나’는 온데간데없고 살아있는 생동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잡다하고 복잡하기만 한 주변적인 것들로 채워져 있는 듯한 말들, 세상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듯한 지식들의 나열로 끝나버리는 말들, 마치 자기를 과시하는 듯이 누가 더 많이 외우고 알고 있는가를 경쟁하는 듯이 말이다. 솔직히 나는 너의, 너에 대한 이야기가 듣고 싶은데.

진정성이란 무엇일까? 건조하고 형식적인, 거짓되고 위선적이지 않은 깊이 있는 만남, 대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내면의 깊은 곳에서부터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공감은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삶에 생기를 줄 수 있는 실천들 말이다.

그 실천은 어디에서부터 출발해야 할까? 당연히 나 아니겠는가? 깊이 없이 겉만을 스치는 대충대충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래서 계속해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출발점이자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돌보는 내적생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한 예를 든다면, 나에게 잘못하는 것(잘 안되는 것)이 있고 잘하는 것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내가 알고 있다면 당연히 잘못하는 것은 멈추고 잘하는 것은 더 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안다고 하면서도 그 잘못하고 있는 것을 계속한다면 무엇으로 그 생활이 개선되겠는가? 안다고 해서 즉시 잘 조절되지도 않겠지만, 여기에 더 나아가 안 한다면 그것은 아는 것의 강도가 너무 약하거나, 모르는 것 아닐까? 모르는 것이다.

더 나아가 신앙생활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일까? 영성생활이란 무엇일까?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복잡하게 설명하는 것은 아닐까? 영성의 ‘영’은 하느님, 또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본성을 말하는 것이고 ‘성’은 나,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본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하느님과 함께 하는 나의 모든 것을 영성(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일차적인 장소는 나의 내면(속)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내적생활이라고도 한다.

하느님 안에서 나의 내면을 잘 들여다보고 잘 가꾸려고 노력하는 것. 이것이 기도 아닐까? 그러기에 신앙생활의 핵심은 기도생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 중요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단, 나는 어떤 기도를 하고 있는가 한 번 생각해보자. 많은 것이 있겠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하느님과 함께 생활하는 기도, 아버지시요 주님이신 하느님 안에서 나를 성찰하고 그분과 순수하고 솔직하게 대화하는 기도를 이야기하고 싶다. 언제 어디서고 할 수 있는.

단, 그곳에는 하느님 그분과 나만 있어야 하며 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다. 다시 또다시 시작하자. 하느님 안에서 나를 찾아 떠나는 길을. 그리고 집중하며 자주자주 머물자. 하느님과 진정한 내가 있는 나의 내면에. 밭(내면)에 보물이 묻혀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박태웅 신부 (수원교구 장애인사목위원회 전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