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환경

[생태칼럼] (24) 우리와 다르지 않은 생명 / 박그림

박그림 (아우구스티노)rn녹색연합·‘설악산국립공원 지키기 국민행동’ 공동대표
입력일 2018-01-16 수정일 2018-01-16 발행일 2018-01-21 제 3079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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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갑고 음산한 겨울바람이 옷 속으로 파고든다. 하루 종일 산양의 흔적을 찾아 산 속을 헤매다 엷어지는 햇볕을 쪼이며 바위 밑에 쪼그리고 앉아 지난가을 설악산 줄기를 타고 오르다 마주쳤던 산양의 모습을 떠올린다.

신갈나무 군락은 누렇게 단풍이 들었고 소나무와 전나무는 더욱 푸르게 보이는 가파른 비탈을 숨을 몰아쉬며 올랐다. 바위절벽을 돌아 온몸이 땀으로 축축해질 즈음 바위 밑에 산양들의 쉼터가 눈에 띄었다. 동글동글하고 반짝이며 윤이 나는 새똥이 한 무더기 소복하게 쌓여 있고 옆으로 오래된 똥들이 흩어져 있었다. 똥냄새를 맡으며 한참을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켜 바위 턱을 넘어서는 순간, 벌떡 일어서는 두 마리 산양이 온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치고 흰 꼬리를 휘날리며 숲 속으로 사라지는 잿빛 산양! 모습은 사라지고 대지를 박차고 달리는 발굽소리가 어둠이 짙어 가는 숲 속에서 길게 이어진다.

야생의 살아있는 아름다움과 힘찬 생명의 소리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넘친다. 어쩌다 산양을 만나는 날이면 산양의 모습과 발굽 소리는 오래도록 눈에 어른거리고 귓가를 맴돌았다. 그 모습과 소리에 이끌려 늘 산에 오르고 산양의 흔적을 더듬게 된다. 어둠이 짙어지고 산양이 사라진 자리에 침낭을 깔고 누웠다. 어두운 하늘에 비친 나뭇가지에 별들이 매달려 바람에 흔들린다. 두 마리의 산양은 이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새로 태어날 새끼가 맞이할 세상에 대한 걱정이었을까? 무거워지는 몸으로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을 견뎌야 할 겨우살이 걱정이었을까? 산양의 마음을 더듬어 나가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고 어느새 새벽빛이 동녘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겨울이 깊어지면서 골짜기가 얼어붙고 눈이 쌓이면 눈밭에 길게 이어진 짐승들의 발자국이 보인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도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할 땅이고 짐승들의 발자국 끝에는 우리와 같이 따뜻한 피가 흐르는 생명이 살아있음을 고맙게 여기게 된다.

눈이 내리고 몹시 추운 날이면 설악산을 바라보며 녀석들의 삶을 걱정하게 된다. 지난겨울 많은 눈으로 여러 마리의 산양과 짐승들의 주검이 눈에 띄었다. 다른 짐승들이 뜯어먹고 주검의 한쪽만 남아있었다. 죽어서 다른 짐승들의 먹이가 되고 그들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다. 겨울철의 눈과 추위는 약하고 병든 녀석들을 솎아내어 튼튼한 자연의 모습을 만들어 간다.

우리들도 자연의 질서에 따라 태어나서 살다가 사라질 뿐이다. 우리와 다르지 않은 생명과 더불어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는 것이다.

- 이번 호부터 박그림(아우구스티노) 녹색연합·‘설악산국립공원 지키기 국민행동’ 공동대표가 생태칼럼을 집필해주시겠습니다.

박 대표는 서울에서 공무원 생활과 회사 경영을 하다 1992년 10월 홀연히 설악산으로 떠나 환경운동가로 변신했습니다. 1993년 3월 ‘설악녹색연합’을 만든 이래 20년 넘게 설악산 모노레일 설치 반대, 대청봉 케이블카 설치 반대운동 등을 펼치며 ‘설악산 지킴이’로 활동해오고 있습니다. 「국립공원 가이드-설악산」(평화출판사/1995), 「산양똥을 먹는 사람」(명상/2000) 등의 저서를 냈습니다. 현재 녹색연합·‘설악산국립공원 지키기 국민행동’ 공동대표를 맡아 일흔 고령에도 하느님 창조질서 보전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생태칼럼 집필을 맡아 수고해주신 조현철 신부님(예수회)과 강금실(에스델) 포럼 지구와사람 대표님께 감사드립니다.

박그림 (아우구스티노)rn녹색연합·‘설악산국립공원 지키기 국민행동’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