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 김혜숙

김혜숙(막시마) 선교사
입력일 2018-01-09 수정일 2018-01-10 발행일 2018-01-14 제 3078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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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주일(사무엘기 상권 3,3ㄴ-10.19   1코린 6,13ㄷ-15ㄱ.17-20   요한 1,35-42)
신앙인의 몸은 하느님 영광 드러내는 자리
체험하고 명상하며 주님 영접할 수 있어

도메니키노 작품 ‘안드레아와 시몬(베드로)에게 예수님을 가리키는 요한 세례자’.

예수께서 어떻게 첫 제자들을 만나셨는지 하느님께서 어떻게 사무엘을 찾아오셨는지 부르심을 전하는 말씀을 만나봅니다. 이 말씀들에 나와 우리가 있습니다. 자, 길을 나서봅시다.

요한은 자신의 제자 두 사람과 서 있다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하고 말합니다. 스승의 말을 듣고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예수께서 먼저 물으십니다.

“무엇을 찾느냐?”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요한 1,38)

요한의 제자들이 건네는 질문에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어느 주소나 마을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대신 “와서 보아라” 하고 초대하십니다. 간결하면서도 분명한 이 말씀은 기꺼운 마음으로 열어주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내가 호기심의 주인공이 되어 가야 합니다. ‘어디’라는 의미가 서로 달랐기에 체험을 통한 변화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어디’는 주소가 있는 건물이나 공간이었지만, 예수님께 ‘어디’는 풍부한 신학적 뜻을 갖고 있는 어떤 특별한 장소입니다. 근원이나 뿌리를 의미하기도 하고, 하느님이 머무는 곳,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무려 열아홉 번이나 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이 말에는 중요한 그리스도 중심의 특징이 담겨 있습니다.

벽지에 선교사로 있었던 때가 떠오릅니다.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 동네에 새롭게 보이는 아이들이 있으면 어른들은 그 아이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너, 누구냐?”라고 묻습니다. 그때 아이들은 그 질문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는지 바로 손가락으로 자기가 나온 ‘집’을 가리키거나 자신들의 아버지 이름을 말합니다. 그러면 어른들은 “으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금방 그 아이가 누군지 알아차립니다. 그 질문은 아이의 이름을 물은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신원, 곧 정체성을 물은 것입니다. 이때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집’은 그 아이의 정체성, 근원, 곧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것이지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나이가 들어도 그 흔들림은 없어지지 않는가 봅니다. 출생한지 얼마 되지 않아 먼 이국땅에 입양된 이들도 자신들의 아픔을 간직한 채 자신의 뿌리를 찾아오는 걸 보면 말입니다.

“대략 오후 네 시쯤이었다.”(39) 그 당시 이 시간은 해가 지는 시간이고, 일반적으로 저녁식사 시간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무엇을 했을까요? 희미한 등불 아래 소박한 음식을 중심에 두고 세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호기심이 가득 찬 두 사람의 눈빛과 잔뜩 미소를 머금고 그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빛은 마치 하늘에서 세 별이 내려앉은 것만 같습니다. 밤이 깊어지면서 그들의 호기심은 점점 변화되어 확신으로 자리합니다. 예수님이 품고 있는 갈망이 말과 몸짓을 통해 드러나고,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차립니다. 다음날 안드레아가 형 시몬을 만났을 때 단정적이며 확신에 찬 그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41) 이 짧은 고백에서 그 밤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었는지 느껴집니다.

몸짓, 몸은 그 사람을 드러냅니다. 보이지 않는 갈망이 그의 말이나 행동, 앎이나 의지, 정신과 기도로 드러나는 것이지요. 사랑이 있으면 사랑이, 갈망이 있으면 그 갈망의 근원이 드러납니다. 그것을 2독서는 힘주어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1코린 6,19)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20) 그렇습니다. 내 몸 자체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느님을 읽는 자리입니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라는 이 질문에 내 존재가 응답을 합니다. 내 존재는 한 남자와 한 여자만으로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더 큰 분의 섭리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 보이지 않는 분의 역사가 놀랍게도 처음부터 자신을 만든 분과 통교할 수 있고 친교를 나눌 수 있는 인간의 역사 안에 자리합니다. 내 몸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만나고, 또 자신의 몸을 통해 세상에 하느님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이고, 이 모상은 점점 완전함으로 변화됩니다.

“와서 보아라”(요한 1,39) 두 동사로만 이루어진 짧은 말은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체험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어떻게 체험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고백할 수 있을까요? “와서”, 나의 믿음과 행위는 그분을 뵈러 가고, “보아라”, 내 체험과 명상은 그분을 보게 됩니다.

놓치고 싶지 않는 부분이 또 있습니다. 1독서에서 엘리야는 자신에게 수련을 받고 있던 사무엘에게,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예수를 만난 안드레아는 그의 형 시몬에게 ‘주님의 찾아오심’을 인도하는 장면들 말입니다. 모두가 아무런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열어주는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의 명상과 체험이 얼마나 확고했기에 이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안드레아의 인도를 받아온 시몬을 눈여겨보고 새로운 이름을 줍니다. 그의 이름에 그의 사명이 쓰여 있습니다. 우리도 세례 때 이름을 받았고, 그로 인해 그분이 찾아온, 사명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와 하룻밤을 머물고 난 후, 나를 누구라고 말할까요? 아니 누구라고 증언해야 나의 정체성과 일치하는 것일까요? 오늘날 사회적 현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몸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질문을 재촉합니다. 어린 학생들마저 짙은 화장을 하고, 한창 싱싱하고 예쁜 젊은이들이 자신만의 개성을 포기하고 판에 찍은 듯 성형을 하고, 건강에 지나친 염려를 하고, 몸짱을 만들기 위해 돈과 시간을 들이고 땀을 흘립니다. 자신만의 유일한 개성은 사라지고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도 없는 미의 기준에 온통 자신을 몰아넣고 있습니다. 참된 아름다움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좀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합니다. 왜냐하면 몸은 나의 소유물도 도구도 아닌 나를 존재케 한 근원과의 관계 안에서만 그 참된 빛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의 품위인 것이지요.

오늘도 주님은 나에게 ‘너, 어디에 묵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사무엘이 자신의 전부를 담아 응답했듯, 화답송에 나를 담습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 김혜숙 선교사는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 신학과, 교황청립 안토니오대학 영성학과를 졸업하고, 교황청립 혼인과 가정 연구를 위한 요한바오로 2세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회원이며, 현재 교황청립 혼인과 가정 연구를 위한 요한 바오로 2세 대학 한국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성스러운 性이야기 33가지, 성·사랑·혼인에 관한 젊은이들의 질문에 답하다」, 「그대, 나의 얼굴」, 「혼인과 가정」, 「요한복음, 그 산에 오르다」 등을 펴냈다.

김혜숙(막시마)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