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민법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나야, 나”

민범식(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품을 받
입력일 2018-01-02 수정일 2018-01-02 발행일 2018-01-07 제 3077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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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인격적인 관계 맺어야 진정한 기도

찬미 예수님.

때와 장소를 정해 하느님을 집중적으로 만나는 시간! 기도의 연습을 시작하셨습니까? 기도의 굳은살이 박이기 시작하셨나요?

기도 연습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들, 곧 자세나 호흡, 묵상기도나 관상기도의 흐름 등에 대해서는 예수회를 비롯한 여러 수도회에서 주관하는 피정이나 기도 학교를 통해 보다 자세하게 배우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방법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아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기도를 하면서 배워나가는 것이 필요하죠. 따라서 기도 연습의 실천적인 부분은 다른 기회에 맡겨드리고, 저는 기도의 전체적인 방향에 대해 몇 가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기도가 하느님과의 우정 어린 만남이요 대화라는 것은 이제 다 아시죠? 그리고 이 대화의 주제가 거룩하고 영적인 것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일상의 사소한 것들에 대한 것일수록 좋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이런 대화일수록 기도는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위한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격적인 만남이란 어떤 만남일까요?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후에 처음으로 스마트폰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야 휴대폰으로 전화통화하고 문자를 주고받는 것이 다였지만, 스마트폰에는 굉장히 많은 기능이 있지요. 인터넷 검색도 하고 메일도 주고받고 또 물건을 살 수도 있습니다. 이런 기능들에 신기해하면서 하나둘씩 배워가고 있었는데, 한 1년 정도 지났을까요? 어느 날 갑자기 메일을 주고받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메일이 새로 와도 스마트폰으로 볼 수가 없었던 겁니다. 어찌하면 좋을까 방법을 찾다가 인터넷에서 해결 방법을 찾았죠. 스마트폰에 연결된 제 계정을 삭제했다가 다시 등록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설명에 따라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가고, 마지막에 “계정을 삭제하시겠습니까?”라는 물음에 주저 없이 “예”를 눌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계정 연결을 했는데,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제 스마트폰에 저장되어 있던 주소록이 다 지워져버린 겁니다!

이리저리 방법을 찾아도 주소록은 다시 복원이 안 되고, 저는 ‘왜 그랬을까’ 후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직 저장된 번호가 많지 않아서 다행이다’ ‘궁금하면 필요한 사람들이 알아서 연락하겠지’ 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아봤지만, 마음 한쪽에선 아쉬움을 달랠 수 없었죠.

그러다 문득 한 가지 방법이 생각났습니다. 주소록에 저장되어 있던 이름은 다 지워졌지만 그래도 그동안 주고받았던 문자의 내용은 남아있으니, 그 내용을 보고서 누구인지 알 수 있으면 그 사람 이름으로 번호를 저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1년 전의 내용을 보고 누군지 알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일단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했던 것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본 문자였지만 그 내용을 보면서는 그 당시에 있었던 일들이 새록새록, 생생하게 기억나더라는 것입니다. ‘아, 이 내용은 그때 동창 누구랑 주고받은 거구나. 그래, 이런 일이 있었지’ ‘아, 이건 그때 어느 수녀원에 미사 부탁받아 가면서 주고받은 내용이구나. 그럼 이 번호는 그 수녀님이시겠다.’ 그렇게 문자를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누구와 주고받은 것인지 알 수 있는 번호는 그 사람 이름으로 저장해나갔습니다.

그런데 남아있는 문자들 중에는 이런 내용의 것도 있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내용만 보고서는 누군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문자였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과의 대화도 마찬가지겠구나!’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지만, 그 내용이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또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등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말이라면, 나중에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 뭐라고 하실까요? 이렇게 물으실지도 모를 일입니다. “누구세요?”

몇 마디 나눈 말마디만으로도 누구인지, 어떤 일인지를 금세 알아차릴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인격적인 만남의 한 모습입니다. 누구나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상대방과 나 사이에 고유하게 또 개별적으로 나눈 이야기들, 그래서 그 내용만 들어도 상대방과 상황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게 하는 대화요 만남인 것입니다. 이러한 만남이 이어질 때 우리는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나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 안에서 우리는 사소한 이야기,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도 모두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던 것이죠.

인격적인 관계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를 전화통화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요즘은 거의 대부분의 전화기에 발신자가 표시되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죠. 그래서 전화가 오면 “여보세요?” 하고 받고, 상대방은 “네, 저 아무갠데요” 하고 통화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전화를 걸어온 사람 중에는 “여보세요?”라는 말에 “어, 나야” 하고 대답하는 사람이 꼭 있기 마련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렇게 말하는 상대방이 누군지 몰라서 다시 묻기도 하지만, 참 신기한 것이, 그렇게 “어, 나야” 하는 말 한마디만으로도 그 사람이 누군지 아는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목소리만 듣고도 누구인지 알아차리는 관계, 바로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격적인 관계를 우리보다 먼저 시작한 분이 계십니다. 누구실까요?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다들 잘 아시는 것처럼, 탈출기 3장을 보면 하느님께서 불타는 떨기를 통해 모세에게 나타나시고 당신 백성을 이끌라는 사명을 주시죠. 그런데 그 말씀을 듣던 모세가 하느님께 ‘당신을 누구시라고 전해야 합니까?’ 여쭙니다. ‘누구세요?’ 하는 물음이죠. 이 물음에 하느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시죠? “나는 있는 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말씀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소개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신학적으로 다양하게 풀이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결국 “어, 나야” 하는 말씀으로 알아들 수 있습니다. ‘누구세요?’ 하는 물음에 ‘나야, 나. 네가 잘 알고 있는, 늘 너와 함께 있는 나란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십니다. 그 상대가 내가 아닌 그 누구여도 상관없는 대화가 아니라, 꼭 ‘나’여야만 하는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시죠. 한마디 말, 그 목소리만으로도 서로 알아차리는 관계,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기도를 시작하면서 하느님께 말씀드려보세요. “하느님, 저예요, 저!” 하느님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응, 너구나!”

민범식(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품을 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