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세상살이 신앙살이] (417) 족보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입력일 2018-01-02 수정일 2018-01-02 발행일 2018-01-07 제 3077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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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에게 물려주라며
신부에게 족보 구입 권유
마지막 경계선 넘지 말아야

얼마 전에 동창 신부님들이랑 식사를 하는 도중에 어느 신부님이 내게 말하기를,

“강 신부, 요즘도 가톨릭신문에 글 쓰고 있어?”

나는 ‘밥 먹다 말고 웬 뜬금없는 말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신부님 얼굴을 보며,

“왜, 대신 써 주게?”

“아니, 네가 쓴 글을 재미있게 읽고 있어. 그리고 신문에 글 쓰면서 별일 없나 해서.”

“신문에 글 쓰면서 별일이라…. 오늘 무슨 일 있어?”

“아니, 갑자기 예전 일이 생각나서. 예전에 어느 일간지에 글 한 번 기고한 적이 있어. 그 지면은 여러 종교의 성직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글을 쓰는 코너인데, 어떻게 해서 글을 쓰게 되었어. 별로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내가 써야 할 상황이라 쓰기는 했지.”

“그래, 무슨 글 썼어? 나도 한 번 찾아봐 읽어야겠다.”

“별 내용 아니니까 그거 찾지 마! 그렇게 글을 한 번 썼을 뿐인데 그 후로….”

그 신부님은 그날, 너무 이야기에 뜸을 들이기에 무슨 사연이 있구나 싶어 추궁하듯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신부님은,

“야, 이 이야기 ‘세상살이 신앙살이’에는 안 실을 거지? 그러면 내가 말해 줄게.”

“걱정 마, 안 실어. 요즘 글 쓸 소재가 얼마나 많은데.”

“좋아. 암튼 그때, 일간지에 딱 한 번, 글을 썼을 뿐인데 그 후로 성당으로 나를 찾는 전화가 계속 오는 거야. 내가 쓴 글 밑에 ‘어느 교구 어느 본당 신부’라고 써 있었거든. 전화를 한 분들은 대부분이 뭐 좀 사 달라, 도와 달라, 그런 내용의 말을 했지. 그런데 유독 끈질긴 분이 있었어.”

“끈질기다고? 왜?”

“종친회 사무실에서 걸려온 전화였어. 그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 종친회에서 이렇게 훌륭한 분이 사제가 되었다는 사실도 기쁜데 이렇게 좋은 글을 쓰셔서 같은 종친회로서 뿌듯한 자부심까지 느낀다는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예전에 비슷한 전화를 받아 본 기억이 났습니다.

“혹시, 족보 사달라는 전화 아냐?”

“야, 너도 그런 전화는 받아 봤구나. 그래 맞아. 족보를 사 달라는 전화였지. 이야기인 즉, 얼마 전에 종친회 차원에서 족보를 발간했는데, 가문 대대로 빛나는 전통을 자랑하는 종친회 족보를 각 집안에서 한질씩 구입을 해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그 사람에게 우리 아버지께서 지난번에 족보를 구입했다고 말했지. 그러자 그분이 하는 말이, 그건 부모님께서 구입하신 것이고 족보는 원래 자식 대에서는 따로 구입을 해 놓는 것이 좋고 다음 세대의 자녀들에게는 새로운 족보가 나오면 그것을 소장하는 것이 가치 있다는 거야. 그래도 나는 사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정중하게 말했지. 그러자 그분이 하는 말이, ‘신부님, 신부님께서 족보를 소장하고 계시다가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면, 조상님의 은덕을 입을 수 있는 훌륭한 일입니다’라고 말하는 거야. 그 순간, 나는 전화기에다 대고 냅다 소리를 질렀지. ‘선생님, 나는 족보를 물려줄 그런 자녀가 없어요.’ 그리고 끊었지, 뭐.”

“그리고 전화는 또 안 왔어?”

“야, 너 같으면 또 하겠냐. 신부님, 신부님 하면서 자녀에게 족보를 물려주라고 했으니, 그게 말이 돼?”

“그분이 말만 좀 잘했으면…. 마음 약해서 족보를 사 주었을 텐데. 신부에게 족보를 사서 자녀에게 주라고 했으니….”

정말로 어느 누구의 삶이건 절대로 건드리면 안 되는 말이나, 행동 등 마지막 넘지 말아야 할 경계선이 있는데, 그걸 건드리셨으니….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