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순교자를 만나다] ‘하느님의 종’ 권철신(암브로시오)·권일신(프란치스코하비에르)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7-12-19 수정일 2017-12-20 발행일 2017-12-25 제 3075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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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암 강학회로 한국교회 기틀 세운 형제
이벽 참석 이후 천주교에 마음 기울여
을사박해 후 교회 재건 운동 주도해

중국 베이징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는 권일신. 탁희성 작

권철신(암브로시오), 권일신(프란치스코하비에르) 형제는 천진암 강학회를 통해 한국교회의 기틀을 세운 초기교회 지도자다.

경기도 양평군 양근면 양근리 갈산에서 태어난 권철신·일신 형제는 학식과 덕망으로 명망이 높은 학자였다. 권철신은 성호 이익의 실학적인 학풍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이에 정약종, 이승훈, 김원성 등 당대 젊은 선비들이 권철신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그렇게 권철신이 동생 권일신과 함께 젊은 선비를 모아 유학을 논하던 자리가 천진암 강학회의 시작이었다.

양근성지 권일신상.

천진암 강학회에 이벽이 참석하면서 천학(天學)을 논하고, 교리를 깨닫게 되자 이들 형제도 천주교에 마음을 기울였다. 특히 권일신은 자신만 신앙을 배우고 실천하는데 그치지 않고, 가족과 친구, 친지들에게도 신앙을 전했다. 이런 노력으로 양근은 신자들의 마을로 변모하게 됐다.

1785년 명례방에 모인 신자들이 잡혀간 을사박해 이후 신자들의 집회가 해산됐다. 권일신은 조동섬(유스티노)과 용문산에서 8일간 피정을 하고 한국교회를 다시 세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권일신을 중심으로 이승훈, 정약용, 정약전 등이 힘을 합쳐 신자들을 모았고, 중국 베이징의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도 신자들의 대표로 권일신이 작성했다. 이후 성직자영입운동을 주도한 것도 권일신이었다.

박해자들은 교회의 중심인물인 권일신을 박해 이전부터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이미 큰 명망이 있는 학자인 권일신이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데 앞장서왔기 때문이다. 권일신은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홍낙안 등의 고발로 체포돼 형조로 잡혀갔다. 형리들은 고문과 매질로 배교를 종용했지만, 권일신은 “이 세상의 무엇을 준다해도 주님을 배반할 수 없고 주님께 대한 의무를 궐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당하겠다”고 고백하면서 신앙을 지켰다. 박해자들은 아첨하고 달래고 회유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권일신을 유혹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평소 권일신의 자질을 높이 평가하던 정조는 반대자들의 사형 요청을 물리치고 제주도로 귀양보내라는 판결을 했다. 그러나 권일신은 1792년 초 귀양길에 오른 첫날 용인군 구성면 구읍의 주막에서 장독(杖毒)으로 순교했다.

손님을 맞이하는 권철신. 탁희성 작

권철신은 천진암 강학회를 통해 신앙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적극적으로 교회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이미 저명한 대학자의 위치에 있는데다가 양반 가문의 맏아들이라 활동에 제약이 많았기 때문이다. 권철신은 주로 교리 공부와 기도생활에 매진했다.

권철신은 박해자들의 모함과 고발에는 개의치 않았지만, 신자들의 배교 소식을 들으면 “저들은 반생의 업적을 무익하게 만들고, 고통으로 의당 받게 될 영광을 잃는다”면서 안타까워하곤 했다. 마침내 권철신은 1801년 신유박해에 체포됐다. 권철신은 형벌을 받으면서도 천주교 교리와 신앙 실천을 변호했다. 결국 같은 해 65세의 나이로 매질을 견디지 못해 순교했다.

※이번 호를 끝으로 ‘교구 순교자를 만나다’ 연재를 마칩니다. 애독해 주신 독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