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삶의 방향 전환

민범식(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품을 받
입력일 2017-12-12 수정일 2017-12-13 발행일 2017-12-17 제 3074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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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게 ‘회개’
우리를 부르는 주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찬미 예수님.

대림 시기 잘 보내고 계십니까? 대림 시기 하면 뭐가 제일 먼저 떠오르세요? 기다림? 깨어 있으라는 복음 말씀? 아니면 대림 시기를 훌쩍 건너뛰어 성탄절 분위기가 떠오르시나요? 여러 많은 것들이 생각되지만, 많은 분들의 말씀 중 하나가 아마도 ‘회개’가 아닌가 싶습니다. 대림 제2주일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회개하라’고 부르짖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듣게 되지요.

그런데 이 회개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언제, 어떻게 회개하면 되는 것일까요?

제가 부제 때의 일입니다. 겨울방학을 맞아 본당 사제관에서 지내고 있는데, 어느 날 주임신부님께서 시베리안 허스키 품종의 강아지 한 마리를 얻어오셨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주 작고 귀여운 새끼였죠. 사실 저는 어릴 때 큰 개에 물린 경험이 있어서 개를 무서워하는데, 이 강아지는 제가 보기에도 아주 귀여웠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이 강아지에게 ‘솔’이라는 이름을 붙이셨습니다. 음계 ‘도레미파솔~’ 할 때의 솔입니다.

그렇게 겨울방학을 솔과 함께 지낸 후, 학기가 시작되면서 저는 신학교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여름방학을 맞아 솔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궁금해하며 사제관으로 갔는데, 응당 있어야 할 그 작고 귀여운 솔이 안 보이는 겁니다. 그리고 사제관 마당에 웬 송아지만 한 개가 한 마리 떡하니 버티고 있었지요. 바로 솔이었습니다. 발육 속도가 워낙 빨라서인지 반년 만에 훌쩍 커버린 솔은 이제 사제관 안이 아닌 마당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래서 사제관을 드나들 때면 저는 영락없이 솔을 마주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솔은 반갑다고 달려드는데 제게는 그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습니다. 가뜩이나 개를 무서워하는데, 솔이 달려들어 뒷발로 딛고 서서 앞발로 제 어깨를 짚고 제 눈앞에 커다란 머리를 들이대면 저는 기겁을 하고 도망치게 되는 거죠.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번 드나들 때마다 그러니 저도 적지 않게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래서 주임신부님이 안 계신 틈을 타 솔을 괴롭힌 적도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죠. 솔이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넓은 설원에서 마음껏 달리던 야성이 그대로 몸속에 남아 있을 텐데 매일 좁은 마당에 갇혀만 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래서 하루는 주임신부님께 날을 잡아 솔을 데리고 같이 산책 나가시자고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신부님께서는 당신도 그러고는 싶은데 걱정이 돼서 못 나가신다는 겁니다. 무슨 걱정이냐 하면, 이 개가 워낙 힘이 좋기 때문에 아무리 튼튼한 목줄을 매고 나가도 어느 순간 뛰쳐나가 버리면 감당할 엄두가 안 나신다는 거였죠. 그래서 못 데리고 나가시기는 한데, 혹시라도 솔을 데리고 나갔다가 놓치게 되면 다시 잡는 방법이 있다며 한 가지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어떤 방법이었을까요?

솔을 데리고 가다가 갑자기 확 뛰쳐나가면 줄을 놓칠 수밖에 없죠. 그런 상황이 일어나면 일단은 그 뒤를 쫓아갑니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 자리에 멈춰 서서 “솔!” 하고 부르는 겁니다. 그럼 솔이 어떻게 할까요? 달리다 멈춰 서서 저를 쳐다보겠죠. 그럼 그때 저는 솔과 반대 방향으로 막 뛰어갑니다. 그럼 솔이 그래도 주인이라고 저를 쫓아서 달려오겠죠. 그런데 속도가 워낙에 빠르다 보니 어느 순간 저를 지나쳐서 다시 제 앞으로 내달릴 겁니다. 그럼 저는 조금 더 가다가 멈춰 서서 다시 솔을 부르는 겁니다. 그러면 달려가던 솔이 멈춰 서서 저를 돌아볼 테고, 저는 다시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거죠.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몇 번 하다 보면, 물론 저도 지치겠지만 솔도 지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속도가 느려지죠. 그렇게 느려진 솔이 옆을 지나갈 때 확 움켜잡으면 솔을 다시 잡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떠세요? 설득력이 있나요? 저로서는 한 번도 솔을 데리고 나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 방법을 실제로 사용해 볼 기회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론상으로는 그럴듯하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자녀로서 하느님을 만나겠다고, 하느님 계신 곳을 찾겠다고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계신 곳을 향해서 열심히 가고 있는데, 갑자기 저 뒤에서 “바오로야” “마리아야” 부르는 소리가 들리죠. 그래서 그쪽을 바라보면, 하느님께서 내가 가던 방향이 아닌 다른 쪽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럼 가던 방향을 돌려서 하느님 계신 곳으로 다시 열심히 걸어갑니다. 그런데 또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고개를 들어보면, 분명히 저쪽에 계신 걸로 봤던 하느님께서 이번에는 이쪽에 계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하죠? 다시 방향을 돌려서 하느님 계신 쪽으로 가는 겁니다.

다들 아시는 것처럼 ‘회개’라는 그리스말 ‘메타노이아’(metanoia) 어원은 ‘방향을 돌리다’라는 뜻입니다. 흔히 말하듯 나의 죄를 뉘우치고 아파하는 것만이 회개가 아니라, 하느님 계신 곳을 향해서 내가 가던 방향을 돌리는 것, 이것이 바로 회개의 참뜻인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대림 시기나 사순시기에만 할 것이 아니죠. 한 번 했다고 해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그때그때 나의 생각과 판단과 행동을 하느님을 향해 돌리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회개의 삶인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계속해서 방향만 바꾸다 끝나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솔이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 달리면서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처럼, 우리도 계속해서 방향을 바꾸면서 조금씩 하느님께 다가가게 됩니다. 평생의 삶을 통해서 점점 하느님과 가까워지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방향을 돌릴 수 있을까요? 방향이 어딘지를 정확히 알아서? 내 힘으로 방향을 찾을 수 있어서? 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방향을 돌릴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찾겠다고 하면서 자꾸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우리들을 하느님께서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할 일은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 목소리를 잘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때론 엉뚱한 길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래서 하느님께로부터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결국엔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께로 데려가신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음성을 듣고 그분을 향해 계속해서 방향을 바꿔나가는 것! 어떠세요? 회개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게만 느껴지지는 않으시죠?

민범식(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품을 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