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세상살이 신앙살이] (414) 가난한 마음의 순례

강석진 신부rn(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입력일 2017-12-12 수정일 2017-12-12 발행일 2017-12-17 제 3074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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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베트남 순교지를 찾아 순례를 떠났습니다. 알뜰하게 짐을 싸고자 베트남에서 생활하는 후배 신부님에게 그곳의 날씨에 관해 물었습니다. 그러자 후배 신부님은 이렇게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베트남 북부지방 날씨가 조금 추운 편입니다. 현재 초겨울 날씨이고, 건물에 단열재가 없어서 건물 안도 차가운 한기가 감돕니다. 그래서 긴팔 옷과 바람막이 같은 외투를 챙겨 오시면 좋겠습니다.”

당연히 겨울옷을 알뜰히 챙겼습니다. 그런데 하노이 공항 출국장을 나오는데 조짐이 이상했습니다. 겨울 분위기는커녕 날씨는 화창하고, 쨍쨍했으며, 이마에서는 땀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수속을 마친 후 공항 밖으로 나와 마중 나온 후배 신부님에게 물었습니다.

“날씨가 겨울이라며?”

그러자 그 신부님은 눈을 껌뻑거리며,

“어제까지는 겨울이었는데, 왜 갑자기 여름이지!”

그 후 나는 겨울옷을 입고, 하노이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의 순교지를 순례했습니다. 베트남 순교자들의 삶을 묵상하면서도 땀을 줄줄 흘렸고, 그들의 신앙을 묵상하면서도 땀을 흘리며 순례 길을 걸었습니다. 베트남 중부 지방을 순례할 때는 더 심각했습니다. 중부 지방에선 그야말로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하노이에서부터 진즉에 겨울 점퍼뿐 아니라 내복과 조끼도 벗었지만, 긴팔 옷을 입고 있는 관계로 땀은 더욱더 쏟아져 내렸습니다.

드디어 마음속으로 결정했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순례를 하더라도, 더위 때문에 분심 드는 것보다 반팔 티셔츠를 사자.’

그래서 베트남 중부 지역 순교지 근처 동네에서 옷 가게를 정신없이 찾다가, 마침내 한 군데를 발견했습니다. ‘오, 하느님!’ 기쁜 마음에 후배 신부님과 나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XXL 사이즈 옷 한 벌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가게 주인은 정색을 하며 제일 큰 것이 XL 사이즈뿐이랍니다.

할 수 없이 XL 사이에서도 조금이라도 커 보이는 옷들은 모두 하나씩 입어 봤지만, 작을 뿐 아니라 몸에 꽉 끼여서 입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옷 한 벌씩을 눈물겹게 입어보는 나를 보는 가게 주인은 사정이 딱하게 느껴졌는지, 창고를 다 뒤져 XXL 사이즈 한 벌을 찾아왔습니다. 감사와 감동으로 그 옷을 입어봤습니다. 색상, 디자인, 그 어떤 것 하나 따질 것 없었습니다. 단 한 벌 뿐인 반팔 옷이 내 몸에 어느 정도 맞자, 당장 사서 갈아입었습니다.

그날 이후, 후배 신부님과 함께 순례를 하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더 많은 기도를 하고 더 많은 묵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내 자신에 물었습니다.

‘왜 옷 한 벌을 살 생각을 미리 하지 못했을까!’

사실 순례를 다니면서 가난한 순례를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단지 ‘가난’이라는 단어에만 갇혀 가난하게 보이는 순례를 했지 정작 가난한 순례, 지혜롭고 슬기로움 안에서 자유로운 순례는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진짜 가난한 자의 마음을 가진 순례는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트남 날씨가 나의 무지함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강석진 신부rn(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