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환경

[생태칼럼] (22) 종강미사

강금실 (에스델)rn포럼 지구와사람 대표rn
입력일 2017-12-12 수정일 2017-12-12 발행일 2017-12-17 제 3074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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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내가 졸업한 대학교의 가톨릭 모임에서 학기 종강미사에 초대해줘서 다녀왔다. 나의 대학시절에는 학생들, 교직원들, 교수들이 가톨릭 모임을 만들어서 개강미사와 종강미사를 함께 지내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대학교에서 가까운 성당의 주임신부님과 수녀님들, 그리고 성당 신자들이 적극 지원을 해서 대학 내의 미사가 이루어지는 것 같았는데, 졸업한지 근 40년만에 학교에 가서 미사를 함께 드린다는 것이 감회 깊었을 뿐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의 조직적 성장이 있는 듯해서 놀랍기도 했다.

미사를 마친 후에는 성당 신자들이 마련해주신 따끈한 어묵과 김밥을 나누는 파티가 있었는데, 다른 약속이 겹쳐 일찍 자리를 떠야 해서 못내 아쉬웠다.

요즘 같은 시대에 젊은이들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경이롭게 느껴진다. 현대는 과학을 통해서 세계의 진면모가 밝혀지는 시대이다. 과학은 보이고, 검증되는 것만을 다룬다. 현미경과 망원경을 통해 시각을 확대해서 보이는 것 중심으로 진리에 접근한다. 이에 반해 신앙적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realization)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증거(evidence)”이다.(히브 11,1) 신앙은 본질에서 과학으로 입증되지 않거나, 과학적으로 믿기 어려운 것을 진리로 믿으라고 요구한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는 예수님 말씀은 신앙의 핵심이다.

객관적으로 입증가능한 과학적 진실은 물질적 차원만을 확실하게 말한다. 물질적 차원에서 이해되며, 더 나아가 장악될 수 있는 대상은 신비감을 상실한다. 더 이상 경외의 대상이 될 수도 없기 때문에 거기에 인간 위의 가치를 둘 수 없게 된다. 그 점에서 현대는 과학적 이성이 발달할수록 세계에 대한 사실적 진술이 늘어가면서 경외와 감탄의 정신적 차원과 심미적 차원을 상실해가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 결과 인간은 가용 가능한 물질적 세계에 둘러싸인 존재가 되었고, 세계는 인간의 효용을 위한 기능적 규모가 확대되는 의미만을 지닌 것이 되었다. 인간의 시각이 우주로 뻗어가는 방식에서도 우주에 대한 지적탐구와 함께 오직 인간 거주영역의 확장가능성에 초점이 맞춰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둑과 이 꽃들을 은빛으로 비추는 아름다운 달이여… 모든 자연에 사랑의 표현을 불어넣는 아름다운 달이여….” 친구가 보내준 이탈리아 가곡의 가사인데, 달의 과학적 실체를 아는 현대인에게 이 노래가사가 가슴에 와닿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인간의 삶은 물질적 차원 뿐 아니라 사랑을 나누는 정신적 관계들,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시켜주는 가치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점에서 각 개인이 겪어야 하는 갈등들의 폭은 더 커진다. 전통사회에서와 같이 하나로 일치된 종교적 세계관이 개인을 보호해주는 기능은 붕괴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인은 더 불안하다. 이 불안의 요소가 신앙이 필요해지는 이유가 되고 있다. 과학이 불안을 해결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인들이 믿음과 과학 사이에 간극을 느끼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이런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려면 과학과 대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성경이 요구하는 무조건의 믿음에 진입해서 마음의 힘이 더 강해지는 신앙체험을 하게 되면, 과학적 진실을 받아들이되, 삶은 그 너머 풍요롭고 신비롭고 위대한 정신의 세계로 나아가는 여정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하느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참 좋고 아름다운 세상을 보존해야 하는 책임을 떠맡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과제이며 거기에서 삶을 출발해야 한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다. 믿음의 힘으로 세상을 밀어붙이며 나아가는 것, 그것이 필요하다.

강금실 (에스델)rn포럼 지구와사람 대표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