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헬기조종사의 병영일기] 어둠을 헤치고

이연세 (요셉) rn예비역 육군 대령, 동서울대학교 강사rn
입력일 2017-12-12 수정일 2017-12-12 발행일 2017-12-17 제 3074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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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초, 살을 에는 듯한 엄동설한에 갑자기 비상이 걸렸습니다. 오대산 지역으로 신속히 병력을 공수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2년 전 강릉지역의 무장간첩 침투사건을 가정한 훈련이었습니다. 칠흑 같은 밤에 서서히 조종간을 당기자 헬기가 사뿐히 활주로를 이륙했습니다. 달도 없는 밤에 시커먼 어둠 속으로 헬기는 빨려 들어갔습니다. 헬기가 산악지역으로 접어들자 잔설이 희끗희끗한 태백산맥 능선이 보였습니다. 골짜기에서는 희미한 불빛 몇 개만이 깜빡이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헬기에는 GPS가 장착되기 전이었으므로 야간에 산속 헬기장을 찾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꼼꼼하게 계기와 지형지물을 대조해 가며 목적지를 향해 비행하고 있을 때 방향지시계가 한 바퀴 뺑 돌았습니다. 순간 부조종사와 저는 당황했습니다. ‘좀 지나면 정상으로 돌아오겠지’라며 기다렸으나 야속하게도 계기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계기의 도움 없이 정확한 지점을 찾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그곳이 그곳 같아 보이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습니다.

계기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사이, 헬기는 방향을 잡지 못하고 계속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극심한 공포감이 몰려오면서 머리가 백지처럼 하얘졌습니다. ‘지형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다가 연료가 떨어져 추락할 수도 있겠구나.’ 순간 가족의 얼굴이 빠르게 스쳤습니다. 이 위급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했습니다.

“K중위! 속도를 줄이면서 고도를 서서히 올려. 중앙방공통제소의 도움을 받아야겠다.”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무전기를 비상주파수로 맞추고 중앙방공통제소를 불렀습니다. “이글 001인데 방향지시계 고장으로 위치를 상실했습니다. 목적지는 오대산입니다. 레이더 유도를 요청합니다.” 이후 우리 헬기는 중앙방공통제소의 유도 아래 목적지에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총알이 날아가듯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자고나면 새로운 신기술이 마구 쏟아집니다. 4차 산업혁명시대에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직업을 잃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측들이 난무합니다. 현재 하고 있는 일도 잘해야 하고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신기술도 배워야 하는데, 나만 혼자 뒤떨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특히 저처럼 퇴직을 하고 울타리가 없어진 사람들은 더욱 불안이 가중되고, 수많은 상념들로 머리가 복잡합니다.

불확실성의 시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송봉모 신부님은 「지금은 다시 사랑할 때」에서 “인생의 어둔 밤에 우리가 의존해야 할 유일한 지팡이는 하느님의 손에 있는 지팡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중앙방공통제소가 깜깜한 밤에 위치를 잃어버린 항공기를 안전하게 유도해 주듯이 주님만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우리를 행복의 문으로 인도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주님은 삶의 이정표이며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중앙방공통제소가 아닐까요.

이연세 (요셉) rn예비역 육군 대령, 동서울대학교 강사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