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방주의 창] 기다림, 희망과 절망의 틈바구니 / 송용민 신부

송용민 신부 (주교회의 사무국장·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입력일 2017-12-12 수정일 2017-12-12 발행일 2017-12-17 제 3074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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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단에 놓인 대림환에 불을 켜는 대림 시기가 시작되면 성탄이 머지않았고,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하는 시간이 되었음을 느낀다. 나이를 먹을수록 속절없이 지나가는 한 해의 덧없음을 푸념하는 것은 열심히 살아온 일상의 흔적들보다는 결심하고 기대했던 일들이 채워지지 않은 후회와 자책의 순간들이 더 많이 떠오르기 때문인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기다림은 언제나 희망의 언어인 듯하지만, 사실 절망의 숨은 얼굴이기도 하다. 내가 기다리는 일들이 행복과 기쁨의 순간일 수도 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가 될 수도 있다. 칼릴 지브란도 책 「예언자」를 통해 기쁨과 슬픔은 양면성을 갖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기쁠 때는 같은 이유로 슬펐던 기억이 치유된 덕분이고, 내가 슬픈 것은 같은 이유로 기뻤던 행복을 상실한 고통일 수 있으니 말이다.

인류가 염원하는 평화와 자유는 유감스럽게도 피할 수 없는 ‘우연성’으로 가득 차 있고, 우리는 불안과 희망의 틈바구니에서 여전히 기다림을 살아간다. 식구라는 이름으로 함께 식탁에 마주 앉아 오순도순 함께 식사하기를 기다리고, 피곤과 스트레스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도 따뜻하게 서로를 맞이해주기를 기다리는 가족들, 갈 곳이 없어 거리를 헤매거나 고독하게 홀로 살아도 따뜻한 밥 한 그릇의 온정의 손길을 기다리는 노숙자들과 독거노인들, 직장 상사의 신임을 얻기 위해 또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직장인들, 좋은 직장과 인연이 찾아오기를 기대하며 수많은 실패한 지원서와 면접을 또다시 기다리는 청년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다.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은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다림 끝에 찾아온 좌절과 실패, 낙담과 절망의 순간들을 두려워하기에 기다림이 우리에게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혹시 내가 직장을 잃게 되지나 않을지, 덜컥 암에 걸리거나, 준비도 못했는데 갑자기 죽음이 나를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두려울 수도 있다. 우리 사회가 연일 밝혀내는 삶의 지표들도 행복한 기다림보다는 우울한 기다림이 많다는 것을 알려준다. 경제적 양극화가 가져오는 가난과 상대적 빈곤감, 가족의 해체와 인간관계의 단절로 인한 우울증과 고독사,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이권 다툼으로 인한 전쟁의 위기, 연일 터지는 정치적 비리와 부정부패, 근대사를 얼룩진 적폐의 고리들과 서로 물고 뜯는 폭로전은 올해에도 변함이 없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20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시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인류 역사의 구원의 때가 예수님 탄생이며,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의 선포가 울려 퍼지던 땅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성탄을 기다리는 지금도 예루살렘 성지는 중동지역의 갈등과 불화를 일으킬 화약고가 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성탄을 기다린다. 비록 예전처럼 캐럴을 들을 수는 없어도, 성탄을 소비하라는 외침 속에서 싸늘하지만 따뜻한 성탄을 기다린다. 그리스도인이 기다리는 성탄은 결코 화려한 트리와 말구유의 불빛이 아니다. 여전히 고통받고 신음하는 인류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믿음이며, 십자가의 고통에서도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신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희망을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은 종말론자들이 외치는 두려운 미래가 아니다. 어두움 속에서 빛을, 절망 속에서 희망을, 슬픔 속에서 기쁨을 찾고 살아가는 ‘작고 보잘것없는 이들’의 미소와 손길 속에서 ‘지금-여기서’ 선포된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는 희망이어야 한다.

불안한 미래를 기다리는 일은 두렵다. 하지만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믿고 올해의 대림 시기도 희망의 기다림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숙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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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용민 신부 (주교회의 사무국장·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