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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하나] ‘경계’(한계)에 대한 또 다른 생각-반드시 겸손해야 하는 이유 / 박태웅 신부

박태웅 신부 (교구 장애인사목위원회 전담)
입력일 2017-12-12 수정일 2017-12-12 발행일 2017-12-17 제 3074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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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글을 쓰고 있지만, 실은 많이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다. 솔직히 내 자신은 많이 부족한 사람이고, 나의 생각이라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주관적인 것이며, 언어와 말이라는 것이 표현수단으로 한계가 있고, 잘 표현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실상은 어떨까? 작은 것에서 시작하여 엄청난 의미를 가진 그 생각과 말과 언어들을 그 정체와 근거와 타당성을 진지하게 따져보지 않고, 정말 습관적으로 조심하지 않고 함부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예를 든다면 많겠지만 ‘일반적’, ‘객관적’, ‘합리적’, ‘맞다’, ‘옳다’, ‘진리’, ‘정의’와 같은 말들이다. 결론부터 말해보자면 나를 출발점으로 해서, 나에게서 나가는 모든 말과 언어들은 결국 그 바탕이 나(의 생각) 아닌가? 즉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든 철저히 나를 한계로 하는 주관적인 것이 아닌가라는 말이다.

한 예로 ‘일반적’이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일반이라는 말은 그 말에 대한 생각과 공감의 범위가 작지 않고 많다, 넓다는 얘기인데, 할 수 없는 말까지는 아니더라도, 도대체 그 말의 근거는 무엇인가? 지금, 그 생각과 말을 듣는 나의 느낌으로는 지극히 불분명한 일상적이고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도대체 어디에서 누가 그렇게 말하며, 몇 명에게 물어보고 확인해 봤길래, 일반적이라는 말로 강조하고 고집을 부리고, 자기 말에 힘을 주어 주장하는가? 전혀 그럴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합리적’이라는 말은 또 어떤가? 위의 경우와 같이 못 할 말은 아니겠지만, ‘사람의 이성은 합리적이다’라고 믿고 말도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의 불완전함과 많이 이성적이지 못한 현실과의 차이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일상 중에 별생각과 이해 없이 내가 사용하고 있는 말과 언어들을 면밀히 살펴보고 반성해보면, 참으로 엉성하고 애매모호한 사용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너무 지나쳐 거짓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여기서 나누고 싶은 골자는 ‘조심성’이다. 그리고 그 조심성의 의미는 경계(한계)를 명확히 아는 것이다. 나에게만. 정말 너무나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내 생각이고 말이고 언어 아닌가. 함부로 습관적으로 뻥을 치거나 과장하거나 확대해, 별것 아닌 것을 중요한 것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즉 무거워지거나 심각해지지 않고, 완고하거나 고집부리지 않아도 될 것들인데 말이다.

이렇게 경계(한계)를 분명히 아는 가운데 생각과 말과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면, 다른 사람과의 대화는 네가 나를 더 풍요롭게 하는 가운데 정말 나눔이 되고, 주장하거나 고집을 부리거나 완고할 이유도 없고, 다른 사람이 나와 생각이 다르고, 공감해주지 않는다고 기분 나쁠 이유가 없으며, 생각이나 의견이 다르다고 싸우거나 다툴 일이 없어지지 않겠는가?

물론 꼭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나는 신앙인이기에 하느님의 뜻과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보편성을 바탕으로 믿어야 하고 선포해야 하며 지켜야 할 것들이 있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즉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는 가치관과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고 동의할 수 없다. 단, 이 양자를 잘 이해하고 그 한계를 넘나드는 것은 많은 노력과 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요즘 많이 얘기하는 다양성 안에서. 또한 나는 이것이 나의 내적 평화와 서로 간의 관계의 평화를 이루는 또 하나의 길이 아닐까 한다. 내가 절대적인 하느님 신앙을 가지고 살지만, 또한 그 신앙생활은 주관적인 면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모두가 그 경계를 잘 아는 가운데 조화와 풍요로움 속에 평화를 누리시기를 바라며. 진정으로.

박태웅 신부 (교구 장애인사목위원회 전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