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나를 위한 최선? 너를 위한 최선?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
입력일 2017-12-05 수정일 2017-12-05 발행일 2017-12-10 제 3073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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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게 살며 ‘너 중심’ 하나씩 배워갑니다
결혼과 육아 모두 상대방을 위한 삶
그리스도인의 소명 더욱 실천하길

찬미 예수님.

얼마 전에 혼배미사를 주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본당에서 사목생활을 하게 되면 함께 활동했던 청년들 혹은 어른 신자분 자녀의 혼배주례 부탁을 많이 받게 되지만, 본당을 떠나 생활한 지가 오래인 저로서는 굉장히 오래간만에 맡게 된 혼배미사였습니다. 그래서였는지 미사를 준비하는 마음이 설레기도 하고 또 약간 긴장되기도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결혼하는 신랑 신부가 정말 하느님 안에서 성가정을 이뤄서 행복하게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강론을 준비했습니다.

몇 번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혼배미사를 주례할 때마다 강론 때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출처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어디선가 읽었던 짧은 우화이지요.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옛날 옛적에 소와 사자가 살았습니다. 둘은 서로 너무나 사랑했지요. 그래서 집안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하면서 소와 사자는 죽을 때까지 평생을 서로 사랑하겠노라고, 서로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소는 사자를 위해서 매일 같이 신선한 풀을 준비했습니다. 아침 이슬이 영롱하게 맺혀있는 신선한 풀을 대접하기 위해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야 하는 고단함도 마다하지 않았죠. 그런데 사자는 어땠을까요? 사실 사자는 풀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풀을 먹는 것은 사자에게는 오히려 고역이었죠. 하지만 사자는 참았습니다. 그것이 소를 위하는 사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사자는 또 나름대로 소를 위해서 매일 신선한 고기를 준비했습니다. 입안에 넣으면 씹기도 전에 사르르 녹아버리는 양질의 고기를 대접하기 위해서 매일 밤늦게까지 사냥해야 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죠. 그런데 소는 어땠을까요? 소 역시도 고기를 먹는 것이 싫었지만, 사자를 생각하며 참았습니다.

하지만 참을성에는 한계가 있죠. 둘은 마주 앉아 얘기를 시작했지만, 그 대화에서 나온 것은 서로에 대한 불만과 비난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둘은 헤어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헤어지면서 소와 사자가 서로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어떤 말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난 최선을 다했어”라는 말입니다.

어떠세요? 소와 사자가 최선을 다한 것이 맞을까요? 네,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소는 소대로 또 사자는 사자대로, 신선한 풀과 고기를 얻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 애를 썼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왜 헤어지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소와 사자가 했던 최선의 노력이 상대방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한 최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해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해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결혼 생활을 해보지 않은 저로서는 그 생활이 어떤지 온전히 알 수 없지만,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참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지만, 삼십 년 가까운 또 때로는 그 이상 되는 시간을 각자 다른 환경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두 사람이 한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서로 부딪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드는 예로 치약 짜는 것을 이야기하죠. 양치질할 때 한 사람은 치약 뚜껑 가까이를 눌러서 짜고 다른 사람은 뒤쪽부터 꼭꼭 눌러서 짜는 것 때문에도 서로 다투기도 한다는 겁니다. 또 누구는 싱겁게 먹고 누구는 짜게 먹는 식습관도 다를 수 있죠. 부부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서로 맞춰가야 하는 부분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분들에서 상대방이 아닌 내가 선택의 기준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이가 태어나게 되면 상황은 또 달라집니다. 물론 새로운 생명이 탄생했다는 기쁨도 크지만, 그때부터 부모의 거의 모든 삶은 아이를 중심으로 맞춰지게 됩니다. 하루의 노고 때문에 지친 몸으로 잠들었다가도 한밤중에 아이가 깨서 울면 달려가야 하죠. 친한 친구들이 모여 동창회를 할 때에도 아이가 어려서 참석을 못하기도 합니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는 부모의 삶이 그 아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 돌보는 것을 아내에게 혹은 남편에게만 맡겨 놓고 나 몰라라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상대방이나 아이가 중심이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살아간다면 이 가정은 어떻게 될까요?

결국, 너 중심의 삶입니다.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그 첫 순간부터 두 사람은 나 중심이 아니라 너 중심으로 살아갈 것을 요구받는 것입니다. 물론 언제나 너 중심으로 살아가지는 못합니다.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나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죠. 그런데 이런 나 중심의 움직임이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라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나 중심의 움직임이 점점 많아지게 되면 앞서 말씀드린 소와 사자의 이야기처럼 안 좋은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혼인성소의 삶은 기본적으로 너 중심으로 살아가게 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너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매일의 삶 안에서 계속해서 연습하게끔 하는 삶이지요. 나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그 안에서 상대방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을 것을 더 많이 요구받게 되는 환경인 것입니다. 나 중심으로 움직이고 싶은 마음과 너 중심으로 움직이라는 부르심 사이의 갈등을 계속해서 겪게 되고, 그 안에서 조금씩 너 중심의 삶으로 변화되어 가게 하는 아주 좋은 훈련의 자리인 것입니다.

물론 너 중심으로 살아가라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받은 소명이기에 사제나 수도자의 삶도 너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꼭 그렇지마는 않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수도자의 경우는 또 다르지만, 적어도 교구 사제는 혼자 살아가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그 안에서 너 중심으로 움직여야 할 필요성도 잘 못 느끼고 그래서 너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배우지 못할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 싶은 것입니다. 물론 많은 신부님들이 사목자로서 양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잘 살아가고 계시지만, 너 중심의 삶은 우리 신자분들께서 훨씬 더 잘 실천하며 살아가고 계시다는 거죠.

하느님을 따라 너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 뭔가 거창하고 대단한 삶이 아닙니다. 전혀 새로운 무엇이 아니라 이미 여러분께서 살아가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다만, 이러한 삶이 계속되어 우리 삶에서 나 중심보다는 너 중심의 모습이 더 많아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히브 10,24)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