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세상살이 신앙살이] (413) 첫사랑 이야기와 양말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입력일 2017-12-05 수정일 2017-12-05 발행일 2017-12-10 제 3073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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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60대 후반의 자매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말수가 워낙 없어서 늘 조용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말만 없을 뿐이지, 놀랍게도 여기저기 당신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달려가 묵묵히 봉사한 후에 소리 없이 사라지는 분이셨습니다.

며칠 전 그 자매님이 친구분들과 수도원을 방문해 자연스럽게 차를 마실 기회가 있었습니다. 나는 자매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답니다.

“자매님, 저는 평소 자매님 삶을 존경합니다. 그런데 살면서 말이 없는 것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거나 힘든 적은 없나요?”

그러자 그 자매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나, 제가 말이 없다니. 아니에요. 저 말 잘 해요. 그리고 존경은 무슨. 그저 하루하루를 하느님 뜻 안에서 살려고 노력하는 것뿐인데. 우리 가족의 경우를 봐도, 제가 말이 없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잘 들어주는 엄마나 아내라고 생각해요.”

“그럼 혹시 자매님은 사는 동안 잊지 못할 재미있는 기억은 있나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 내가 왜 그랬는지, 하는 기억이 하나 있어요. 그때가 고등학교 2학년 국사 시간이었어요. 성탄절이 가까웠던 것으로 기억해요. 학기말 시험도 끝나 분위기도 뒤숭숭하고 마침 눈도 와 우리 반 친구들의 마음 또한 아련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한 친구가 ‘선생님, 날씨도 그렇고 그런데 선생님의 첫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안 돼요?’ 하고 말했어요. 그러자 다른 친구들도 일제히 ‘와’ 하고 소리 내고 책상을 치기도 하면서 좋아했어요.”

“하하하, 여고에서 남자 선생님의 첫사랑 이야기는 언제나 가슴을 설레게 만들잖아요.”

“맞아요. 암튼 그날 친구들 모두는 이구동성으로 ‘선생님’, ‘첫사랑’ 하면서 책상을 치거나 손뼉을 치며 선생님께 졸랐어요. 그런데 너무나 ‘FM’이었던 선생님은 묵묵히 진도를 빼려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 반 학생들은 더 간절히 ‘첫사랑’, ‘첫사랑’ 하고 소리를 질렀어요. 그러자 선생님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웃으며 말했어요. ‘정말 내 첫사랑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은 자기 양말을 벗어 입에 물어요.’ 그날 선생님은 첫사랑 이야기를 해 줄 용의가 없었던 거지요.”

“친구들은 김이 빠져 ‘에이’ ‘에이’ 하며 포기했어요.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나는 조용히 책상을 밀치고 양말 한 쪽을 벗었어요. 그런 다음 그 냄새가 나는 양말을 조용히 입에 물었어요. 그러면서 속으로 ‘다른 친구들도 양말을 입에 물겠지’ 했어요. 그런데 웬걸 우리 반 친구들 모두가 양말을 입에 문 내 모습을 보고 경악을 했죠. 선생님도 깜짝 놀란 듯 순간 얼어버린 표정을 짓더라구요. 그리고 선생님은 항상 들고 다니는 봉으로 내 책상에 치더니 ‘무슨 첫사랑 타령이냐’고 화를 내시는 거예요. 그날 나는 하루 종일 생각했어요. 양말을 입에 물면 첫사랑 이야기를 해 주신다던 선생님이 양말을 입에 물었던 나에게 왜 그리 야단을 치셨는지….”

지금도 내면의 활화산 같은 소신을 갖춘 삶을 사는 분들, 그저 놀라움과 존경을 드릴 따름입니다.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