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창립 100주년 맞은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17-12-05 수정일 2017-12-06 발행일 2017-12-10 제 3073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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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없는 민중들 곁에서 이 땅의 정의를 외쳤다
1933년 선교사 10명 한국에 첫발
일제강점기부터 근현대사 함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 실천
특히 가난한 이들과 연대에 노력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세계 총장 케빈 오닐 신부, 한국지부장 김종근 신부, 이하 골롬반회)가 창립 100주년을 맞았다. 골롬반회는 중국 선교를 위해 창립, 현재 전 세계 15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지난 11월 23일부터 2018년 11월 24일까지 1년 동안 창립 100주년을 기념한다. 골롬반회 한국지부도 12월 2일 광주에서 광주대교구장 김희중 대주교 주례로 100주년 기념 개막미사를 봉헌했다. 골롬반회 창립 100주년을 맞아, 지난 100년의 역사를 살펴보고 새로운 선교의 꿈과 희망을 들어본다.

1933년 10월 29일 전라도 지역에 도착한 10명의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신부들이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한국명 안세화·앞줄 가운데)와 자리를 함께했다.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제공

■ ‘백성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친애하는 신부님,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 백성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의견입니다.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을지 모르지만… 무엇이든 하느님이 보내시는 것을 사제들이 먼저 받아들이고 대면해야 할 것입니다… 본당이 위험하게 되면 잠시 피하되 오래 떠나 있지는 마십시오.”(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창설자 에드워드 갈빈 주교 서한, 1927년 4월 20일)

12월 2일 골롬반회 창립 100주년 개막미사 중 갈빈 주교가 중국의 선교회 회원들에게 보낸 서한이 낭독되자 참석자들은 모두 숙연해졌다. 갈빈 주교는 자기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위험에 처할지라도 사제는 백성들과 함께 있을 것을 권고했다. 그가 서한을 보냈던 당시는 중국과 열강들 사이의 전운이 감돌고, 공산주의자들과 반공주의자들 간의 충돌이 예상되던 때였다. 1933년 한국에 처음 진출한 선교사들의 삶도 그러했다. 골롬반회 주보성인인 골롬반 성인 스스로도 모범을 보인 것처럼, 선교사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나그네’(Peregrinatio pro Christo)로서 고향을 떠나 다른 문화 속에서 복음을 전하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고 정의를 실천해왔다.

제주에서 감자를 재배한 후 농민들과 함께 수확의 기쁨을 나누고 있는 임피제 신부(뒷줄 왼쪽에서 두번째).

■ 수난의 민족사와 함께한 선교여정

골롬반회가 한국에 처음 진출한 때는 1933년 10월 29일이다. 당시 10명의 선교사가 전라도 지역에 도착했다. 두 해 전인 1931년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열린 한국 지역 시노드에서 전라도 감목대리구가 설정되고 새 선교지를 맡을 선교회가 필요해지자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은 골롬반회에 그 임무를 맡겼다. 이에 따라 골롬반회는 중국과 필리핀에 이어 아시아에서는 세 번째로 한국에 진출했다.

전라도에서 선교의 첫발을 내디딘 골롬반회는 광주와 제주 지역 교회의 초석을 다졌고, 춘천과 원주교구의 설정과 선교에도 기여했다. 이어 서울대교구를 비롯해 인천, 수원, 안동, 부산교구에서도 활동했다. 지역교회가 자립하게 되면 미련없이 새로운 선교지로 떠나는 것을 원칙으로 삼은 골롬반회가 한국교회에서 세운 본당만 130여 개가 훌쩍 넘는다.

특히 골롬반회는 한국 민족과 함께 격동과 수난의 근현대사를 함께 헤쳐 왔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말 제주에서 사목하던 패트릭 더슨 신부 등 3명은 일본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한국전쟁 중에는 안토니 컬리어 신부 등 7명의 선교사가 순교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이 땅에서 골롬반회는 가난한 주민들을 돕기 위한 지역 발전 사업을 펼치고 조선소와 전력발전소도 세웠다. 지역 특징을 살려, 제주에서는 빈곤 퇴치를 위한 목축 사업을 시작했고 서울에서는 야학과 노동자센터 운영, 행복한 가정운동 등을 시도했다. 1953년에는 한국교회에 레지오 마리애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오기백 신부(가운데 흰옷)는 1992년부터 6년 동안 서울 봉천동에서 사목하며 재개발로 삶의 터전을 잃은 철거민들과 함께했다.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제공

■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골롬반회의 선교에 대한 인식과 선교를 수행하는 방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골롬반회는 공의회 이후 지역의 문화를 더욱 적극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학생사목과 병원사목뿐 아니라 한국문학의 영문 번역, 대학 강의를 통한 문화 교류 등으로 선교 영역을 확장했다.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에도 광주에서 사목하던 골롬반 사제들은 정부 측의 철수 요청에 응하지 않고 지역민들과 남았다. 이들의 선택은 이 시대의 가난한 이들 곁에서 정의를 지켜나가는 지침이 됐다. 정의 구현과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에 대한 의식을 더욱 확고하게 다지게 된 것이다.

골롬반회는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설정 200주년 이후 한국교회가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전환되면서, 한국교회가 ‘선교적 교회’가 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1982년 골롬반회는 총회를 통해 선교지에서도 회원을 받아들이는 방안을 마련했다. 이에 따라 한국인 신학생 지원자들을 받아들였고, 한국교회 최초로 외방선교를 위한 평신도 선교사 제도를 도입했다.

■ 시대의 징표에 민감하게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1993년 골롬반회 한국 진출 6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언제나 시대의 징표를 파악하는데 민감하고 시대의 요구에 응하는, 특히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가난한 형제자매들에게 헌신하는 골롬반회 신부님들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골롬반회 ‘100주년 위원회’ 위원장인 오기백 신부도 “특정한 역사와 시대에서 골롬반회가 직접 겪은 경험, 성찰과 논의로부터 골롬반회의 모든 변화는 시작됐다”고 밝혔다.

골롬반회는 항상 시대의 징표를 민감하게 발견하고 시대의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6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골롬반회 총회는 징표를 발견하고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논의하는 자리다. 총회에서 결정한 지침들은 각 선교지에서의 활동에 직접적으로 반영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후 첫 총회인 1970년 총회에서는 공의회 정신의 실현이 강조됐고, 1976년에는 정의평화 부서 설치, 가난한 이들의 해방, 타종교와의 대화가 선교회의 임무로 규정됐다. 이어 환경보호와 평신도 선교사 양성(1988년)이 결의됐고, 사제와 평신도의 공동 협력(1994년), 세계화의 부작용과 이주민 문제(2000년), 다문화와 지구온난화(2006년)가 선교적 관심의 주된 대상이 됐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노력의 바탕에는 항상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과 연대가 자리 잡고 있다.

지난 11월 1일 한국을 방문한 골롬반회 세계 총장 케빈 오닐 신부는 가톨릭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가장 먼저 가난한 이들이 어디 있는지를 먼저 보고 그들의 요구에 응답해야 한다”면서 그것이 ‘선교의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광주대교구 총대리 옥현진 주교는 2007년 골롬반회 선교 활동에 대해 쓴 논문을 통해 골롬반회 선교사들은 “민중과 함께 고난당하고 박해받으며 하느님의 복음 말씀을 전하고자 했다”면서 “특히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의 독립을 믿고 독립 정신을 일깨워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평가했다.

골롬반회가 걸어온 지난 100년은 끊임없는 변화, 자기 쇄신의 시간이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과 그들과 맺는 연대는 그러한 변화의 큰 줄기였다.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자 모였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 또 다른 100년을 맞으며 선교사명에 충실하기 위한 길을 찾아나갈 것입니다.”(「골롬반 선교」 2017년 겨울호, 오기백 신부의 ‘총회 문헌으로 살펴본 골롬반회의 변화’ 중에서)

◎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는

12월 2일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창립 100주년 개막미사에서 광주대교구장 김희중 대주교가 골롬반회 선교사들의 한국 진출 당시 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다. 박영호 기자

1916년 에드워드 갈빈(Edward Galvin) 주교와 존 블러윅(John Blowick) 신부에 의해 아일랜드에서 시작됐다.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가톨릭 선교사제 단체, 평신도 단체로서 현재 한국과 필리핀, 칠레, 페루 등 15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한다. 홍콩에 총본부를 두고 있으며 현재 사제 381명, 신학생 37명, 지원 사제 14명, 평신도 선교사 50명이 활동하고 있다. 한국인 사제는 총 15명이다. 한국에는 1933년 진출했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