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민족·화해·일치] 진실과 거짓, 그러나 진심 II / 손서정

손서정 (베아트릭스) 평화활동가
입력일 2017-12-05 수정일 2017-12-05 발행일 2017-12-10 제 3073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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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다신 만난 건, 1년이 지난 후였다. 처음에는 만났다기보다 그녀의 탈북증언을 현장에서 보고 들었다는 편이 맞다. 증언을 듣고 아파하며 격려와 축복의 메시지를 보냈고, 후에 세상의 엇갈린 평을 듣고 그녀의 진실을 응원하고 돕고 싶은 마음을 메일로 전했다. 답장은 없었지만, 나는 그 사안보다는 진심을 간직하려고 애쓰며 바쁜 일상 속으로 돌아왔다.

그녀를 다시 만난 당시, 나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는 중이었다. 나의 주 업무 중 하나는 인권이사회에서 유엔가입국들의 인권 향상을 위한 논의를 진행할 때 각국의 시민단체가 참가해 의견과 증언을 피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날은 북한에 대한 논의를 하는 날이었고, 회의장으로 들어가는 절차가 훨씬 삼엄해서 유엔에서 관리하는 셰퍼드 두 마리가 미리 들어와 살피며 폭탄 탐지를 하기도 했다. 회의순서는 각국의 외교관과 유엔주재 대사들이 먼저 조사 발표나 제안을 하고, 이후에 시민단체들이 발언을 한다. 그날도 나는 발언할 시민단체의 리스트를 받아 그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런데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그녀는 한 국제 NGO가 초청해 발언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다가가 안내해야 했다. 그때의 내 마음은 다른 국제시민단체 대표나 증언자들을 안내할 때와는 달리 착잡한 심정이었다. 특히 시민단체의 중요한 역할을 부르짖고 지지하던 나는 친절히 안내하긴 했지만,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증언에 대한 불안감이 교차했다.

증언은 1년 전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만난 그녀는 내 옆에 있었고, 증언을 하기 위해 발언대에 앉아 절차를 안내하는 나를 의지하고 있었다. 북한 인권을 다루는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특별히 더 귀를 열어둔 채로 회의에 몰두했고, 그녀가 발언을 할 때에는 북한대사의 표정과 증언하는 그녀를 복잡한 맘으로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렇게 회의는 끝나갔다.

그날 오후, 회의장 밖에서는 시민단체가 주관하는 북한에 대한 특별 세션이 있었다. 내가 진행보고를 하기로 돼서 점심을 대충 때우고 참석했다. 한참 시작되는 즈음, 그녀가 우리 측 외교관과 같이 들어와서 내 옆자리에 앉았다. 아, 굳이 왜라는 피하고픈 교차되는 감정과 함께 조금은 불안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이 왠지 안쓰러웠다. 잠시 후, 난 가방 속에 있던 초콜릿을 그녀에게 살짝 건넸다. 그녀는 내 목에 걸린 명찰을 손으로 집어 확인하고는 다시 한 번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1년 전에 메일로 보냈던 내 이름을 떠올렸을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은 서로의 진심을 보았던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세상이 보내는 판단에 치우쳐 더 열정적으로 다가갈 수 없었던 것이 조금은 아쉽다. 내 본연의 인간적인 모습으로 만났다면, 차 한잔이라도 하며 진심을 깊이 나눠 둘에게 진실로 피어날 순간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손서정 (베아트릭스) 평화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