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삶으로 드리는 기도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
입력일 2017-11-28 수정일 2017-11-28 발행일 2017-12-03 제 3072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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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이 하느님 만나는데 작은 도움이라도 되길…”
‘너 중심’의 모습 찾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찬미 예수님.

‘학기말 증후군’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겨울 방학을 3주 남짓 남겨놓고 있는 지금, 그동안 쌓인 피로에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음을 계속 느끼는 요즈음입니다. 더구나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1학기 말보다는 한 해가 끝나가는 2학기의 마지막이 더 힘겹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방학만 와라!’ 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지요. 물론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다른 분들께 또다시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그래도 저는 방학이라도 있어서 길게 쉴 수 있는 여유가 있지만, 방학이 없는 훨씬 더 많은 분들께는 꿈만 같은 이야기, 배부른 소리 하는 것으로 들릴 테니까요. 그래서 다른 분들께는 죄송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힘든 걸 어쩌겠습니까? 제가 느끼는 힘겨움은 제 주관적인 상황 안에서는 나름대로 현실이니까요. 그래서 오늘 하루도 방학이 며칠 남았는지를 셈하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신문사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올 초에 말씀드렸다시피, 원래 이 지면의 글을 한 해 동안 연재하기로 계획하고 시작한 것인데, 글의 내용이 좋고 또 독자분들의 반응도 좋아서 조금 더 연장해서 써줄 수 있겠냐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이미 가을에 접어들면서부터 남은 연재 횟수가 몇 번인지를 헤아렸었습니다. ‘아, 이제 몇 번 안 남았구나. 이 일이 다 끝나면 부담이 훨씬 줄겠구나’ 하면서 연재가 끝나길 내심 기다리는 마음이었죠. 물론 그동안 글을 써오면서는 감사한 마음도 많았습니다. 글을 쓰면서 제 스스로 많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고, 또 그러는 가운데 몇몇 분들께도 도움이 될 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글을 쓰는 부담이 적지 않았기에, 연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랬던 저였기에 찾아오신 담당 기자께서 말씀을 꺼내셨을 때 제 첫 마음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거절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제는 더 풀어낼 것도 없고, 한 해 동안 쓸 계획으로 진행했던 것이라 내용 전개도 맞지 않고, 또 신학생 양성소임에 더 전념하기 위해서 다른 일을 줄이려고 하고…. 여러 이유를 대면서 연재를 계속하는 것은 어렵겠다고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담당 기자께서 여러 좋은 말씀을 해주시면서, 조금 더 생각해보고 결정해주기를 부탁하시고는 돌아가셨습니다.

그때부터 제 고민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안에서 여러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들었던 것은 우쭐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 내가 쓰는 글이 반응이 좋구나. 그럼 그렇지!’ ‘이런 반응이라면 연재를 계속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더 쓰겠다고 말씀드려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 안에서 일어난 과시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에 이어서 금방, 더는 못하겠다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사실 썩 좋은 글도 아니고, 또 이 글 쓰는 것 때문에 알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괜히 안 잡혀도 될 흉이나 잡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던 적도 종종 있었지요. ‘그래, 사람들의 반응이 좋다던 담당 기자의 말도 사실은 나를 격려하기 위해서 지어낸 말일 거야.’ 이제는 더 풀어낼 이야깃거리도 없다고 생각하니, 연재를 더 하려는 건 스스로를 드러내려는 헛된 욕심일 뿐이다 싶었습니다. 제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자기비하의 욕구였습니다.

이렇게 저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과 또 스스로 자신 없어 하는 마음들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그런 고민을 하는 것조차 힘겨워졌습니다. 그리고는 더 고민할 것 없이 거절해야겠다고 마음먹으려던 순간, 거절에 대한 부담감이 크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또 간곡하게 부탁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절하면 제가 어떤 사람으로 비춰질까 하는 마음이 들었던 거죠. 담당 기자께도 또 신문사에도 좋은 사람으로 비춰지고 싶은 마음, 그래서 속으로는 힘겨워하면서도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응하게 하는 욕구, 비난/실패를 피하려는 욕구였습니다.

‘어떤 결정이 정말 하느님 마음에 드는, 그리고 교회를 위한 일일까’ 물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가졌던 마음, 그리고 앞으로 조금 더 연재를 계속한다면 어떤 마음으로 써나갈 수 있을지 물었습니다.

어쨌거나 제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힘들더라도 거절하는 게 더 좋을 겁니다. “어렵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말씀드리는 것이 어렵기는 해도, 그때만 지나면 나머지 시간들은 더 편안하게 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쭐하는 마음이나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연재를 계속한다면, 이후의 시간들은 ‘내가 바보같이 왜 그랬을까’ 후회하며 계속해서 스스로를 탓하는 시간으로 보내게 될 것입니다. 제 자신을 탓할 뿐만 아니라 연재를 더 해달라고 부탁하신 분들에 대한 원망의 마음도 생길 수 있겠죠.

모두, 나 중심의 모습입니다. 내가 편하자고 거절을 하든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서 수락을 하든, 모두 제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위하려는 모습인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 너 중심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생각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께는 아니어도 그중 몇몇 분에게만이라도 하느님을 만나는 데에 작은 도움이라도 드릴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고 감사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군데군데 흠 잡힐 구석이 많은 글이라 하더라도, 그걸로 인해 안 드러날 수도 있었던 제 부족함이 드러난다 하더라도, 그게 지금의 제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그런 부족함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저라는 사람 전체가 다 부족하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닐 테니까요. 이런 마음이라면, 연재를 계속하더라도 그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겠다 싶었습니다. 물론 글을 써 나가다 보면 또 언제고 소재가 떠오르지 않아서 속을 끓일 때가 있을 겁니다. 마감 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담당 기자님께 죄송하다는 연락을 드려야 할 때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때 내가 왜 거절하지 못했을까? 난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하는 자기비하와 자책감은 들지 않을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가 기꺼이 받아들인 선택이니까요. 이런저런 생각과 더불어 몇몇 분들께 의견을 구하면서, 결국 연재를 조금 더 이어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나 중심의 욕구들에서 벗어나 너 중심의 모습으로 건너가는 것, 그 여정에 있을 어려움을 알면서도 선택하는 것! 우리의 삶이 모두 다 너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겪게 되는 크고 작은 일 안에서 그때그때 너 중심의 모습을 찾고 선택해 나가는 것, 이것이 우리 삶으로 드리는 기도가 아닐까요?

“정녕 주 하느님, 제 눈이 당신을 향합니다.”(시편 141,8)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