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

[글로벌 칼럼] (12) 페드로 아루페 신부와 프란치스코 교황 / 마이클 켈리 신부(예수회)

마이클 켈리 신부(예수회)rn마이클 켈리 신부는 호주 출신의 예수회 사제다. CathNew
입력일 2017-11-28 수정일 2018-06-27 발행일 2017-12-03 제 3072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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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아시아 선교 열정에 큰 영향 끼쳐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인물 중에 상대적으로 잘 언급되지 않은 사람이 있다. 바로 1965년부터 1983년까지 예수회 총장을 지냈던 페드로 아루페 신부다. 아루페 신부는 36살이라는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였던 호르헤 베르골료 신부를 아르헨티나의 예수회 관구장으로 임명한 장본인이다.

또한 아루페 신부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로마의 주교로서 아시아 선교를 우선사항으로 삼는데도 일조했다. 교황은 종종 로마 제수 성당에 있는 아루페 신부의 무덤을 찾아 잠시 머물며 기도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베르골료 신부는 1973년부터 1979년까지 예수회 아르헨티나 관구장을 역임했다. 지금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된 베르골료 신부는 당시 자신의 관구장 임명을 “미친 짓”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관구장직을 수행할 만한 경륜이 없었고, 당시는 아르헨티나 사회뿐만 아니라 예수회원 사이에서도 갈등과 분열이 횡행하던 시기여서, 젊은 신부가 이를 감당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베르골료 신부가 관구장직을 받아들인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우선 유력한 관구장 후보자가 교통사고로 숨져 마땅한 후보자가 없었다. 또 당시에는 젊은 예수회원들에게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 관구장으로 뽑히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베르골료는 아르헨티나 예수회 양성장이었다.

관구장 경험은 베르골료 신부가 지도자로서 활동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아루페 신부가 임명한 베르골료 신부는 영성적으로 성숙한 젊은이였으며 공정하게 아르헨티나 관구를 이끌었다. 당시 예수회 아르헨티나 관구는 분열됐으며, 많은 회원들이 예수회를 떠나기도 했다. 따라서 그는 젊은 예수회원들에게 커다란 희망이 되었다.

관구장직을 수행하는 동안 베르골료 신부는 아루페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베르골료 신부는 오늘날 예수회 활동에 큰 영감을 줬던 1975년 제32차 총회의 숨은 일꾼 역할을 했다. 당시 총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뒤 예수회의 사명을 현대적으로 재조명했다.

아루페 신부와 교황의 관계는 좀 더 이전인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수회 총장이 되기 전 아루페 신부는 일본 관구장이었다. 아루페 신부는 아르헨티나를 포함해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예수회 입회자를 찾고 예수회의 일본 활동을 위한 기금을 모금했다. 교황은 당시 아루페를 만났고 일본 선교 열정을 키웠다. 하지만 건강 문제로 실현하지 못했다.

예수회는 초창기부터 아시아 선교에 열정을 불태웠다. 마테오 리치와 알렉산드레 데 로데스, 로베르토 디 노빌리와 같은 초창기 선교사들은 중국과 베트남, 인도 등지에서 현지 문화를 수용하며 선교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현재까지 예수회의 우상이자 활동의 기준이 됐다. 이와 같은 예수회의 전통은 프란치스코 교황에게도 남아있다.

1960년대 아루페 신부와 그의 조언자들은 예수회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수도회의 창립 정신을 재발견하고 교회의 쇄신을 위해 공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는 교황과 신학자들을 포함해서 식민주의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에 끼친 경제적·사회적 악영향을 반성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도전 아래에서 사회교리가 빠르게 형성됐고, 예수회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신앙과 정의의 증진”을 새로운 사명으로 삼게 됐다.

예수회원들에게 프란치스코 교황의 언행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냐시오의 영신수련과 제32차 예수회 총회, 예수회가 겪어온 역사와 예수회 안의 긴장과 갈등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이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예수회가 지난 50년 동안 걸어온 신앙의 여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열매라는 것에 이견을 보이진 않을 것이다.

마이클 켈리 신부(예수회)rn마이클 켈리 신부는 호주 출신의 예수회 사제다. CathN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