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순교자를 만나다] 복자 최 바르바라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7-11-28 수정일 2017-11-28 발행일 2017-12-03 제 3072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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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곡진 삶, 모진 박해에도 순교 신념 꿋꿋이
순교자 최창주의 딸 남편 잃고도 시부 모시며 효행

복자 최 바르바라 초상화.

여주성당 순교자 현양비. 복자 최 바르바라를 비롯해 여주 출신 17위 순교자를 현양하고 있다.

최(바르바라) 복자는 삶과 박해의 모진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고 증거했다.

복자는 1801년 순교한 최창주(마르첼리노)의 딸이다. ‘최조이’나 ‘최소사(召史)’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곤 하지만, ‘조이’와 ‘소사’는 주로 성 뒤에 붙여 쓰면서 과부를 점잖게 부르는 말이다.

여주 지역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복자는 어려서부터 교리를 배워 신앙을 익혔다. 복자는 온 가족을 입교시키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부친의 모습을 보고 배우며 자랐다. 그러나 부친이 순교한 뒤에는 가세가 기울어 비참하고 가난한 생활을 이어가게 됐다.

복자는 어려운 생활 중에도 교리 실천을 멈추지 않았다. 천주와 이웃을 향한 열렬한 애덕과 인내의 삶은 복자의 주위 사람들을 탄복하게 했다고 한다.

성장한 후에는 신태보(베드로)의 아들과 결혼했다. 신태보는 신유박해로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고 신앙을 전하는 일에 매진하던 신자였다. 신앙이 굳건한 신태보의 집안사람이 돼 가정도 이루고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다는 기쁨도 잠시, 복자는 혼인 후 얼마 뒤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됐다.

복자는 늙은 시아버지를 모시고 박해를 피해 여러 지방을 전전하며 살아갔다. 시아버지 곁에 홀로 남아 어려움도 많았지만, 피로나 슬픔을 드러내지 않고 생활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827년 정해박해 때 시아버지 신태보가 체포됐다.

시아버지의 옥살이로 갈 곳을 잃은 복자는 친척이나 친구들의 집에 얹혀살아야 했다. 그 와중에도 옥에 갇힌 시아버지를 찾으며, 시아버지와 다른 죄수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다.

복자는 1839년 기해박해에 전라도 광주에 있던 홍재영(프로타시오)의 집에서 생활하던 신자들과 함께 체포됐다. 전주로 압송된 복자는 평온한 마음으로 문초와 형벌을 참아냈다. 그러면서 자신이 1801년 순교한 최창주의 딸이며 1839년 전주에서 순교한 신태보가 자신의 시아버지라고 떳떳하게 밝혔다. 감사가 복자의 고백을 듣고 “너는 죽는 길밖에 없다”고 말하자 복자는 “죽음은 제가 바라던 것이고, 오래전부터 저는 그 준비를 해오고 있었다”고 대답해 순교를 향한 굳은 신념을 보였다.

복자는 이후 조정에서 사형 판결이 날 때까지 옥에 갇혀있다 1840년 1월 4일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순교할 당시 복자의 나이는 50세였다. 복자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있다.

“최조이는 그 부친과 시아버지가 모두 천주교 신자로 흉악한 종자이며,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앙을 믿어 고질이 되었다. 천주교 교리를 가업으로 여기고 형벌을 다반사(茶飯事)로 여기니, 이는 죄를 끊임없이 저지르는 무리와 같다.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