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헬기조종사의 병영일기] 내 인생의 스승

이연세 (요셉) rn예비역 육군 대령rn동서울대학교 강사
입력일 2017-11-21 수정일 2017-11-21 발행일 2017-11-26 제 3071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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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편 23,3)

“보좌관님! 사단으로부터 공문을 받았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대선배가 앉아 있는 책상 모서리에 엉거주춤 서서 떨리는 목소리로 슬며시 공문을 내밀었습니다. P선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문서를 대충 훑어본 다음,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저를 올려다보며 “이 중위! 저기 있는 의자 가져와서 여기 앉아봐”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서류함에서 두꺼운 책 두 권을 꺼내왔습니다. 가만히 곁눈질로 표지를 보니 육군규정과 사단 행정내규라는 규정집이었습니다.

“언제 참모업무 해본 적 있나.”

“아닙니다.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럼 문서처리에 대해서 배우지 못했겠구나”라면서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문서의 구성부터 작성된 문서의 처리절차까지 일일이 규정을 찾아가며 자세하게 설명한 후, 회신 공문을 능숙하게 작성해줬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가르쳐줬으니 다음에는 이 중위가 한 번 작성해봐. 직접 해봐야 배울 수 있어”라면서 친절하게 문서를 건넸습니다.

그때부터 업무를 수행하면서 막힐 때마다 P선배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P선배는 평소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었지만 업무를 가르쳐 줄 때는 동생을 대하듯 자상하면서도 엄격하게 지도했습니다. 당시 P선배가 가장 강조한 부분은 ‘관련 규정과 지침에 따라서 업무를 수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전임자가 해놓은 것을 베끼다가는 언젠가는 큰코 다친다”라는 충고를 덧붙였습니다. 몇 개월이 지났을까, 부대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모(某) 장교가 규정이 변경된 것을 모르고 전임자가 했던 것을 그대로 베꼈다가 문제를 발생시킨 것입니다. 그 이후 규정과 지침에 의한 업무 처리는 저의 업무수행 원칙의 첫 번째 덕목(德目)이 됐습니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저는 참으로 인복(人福)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삶의 고비마다 P선배와 같은 많은 스승들의 지혜로운 조언으로 어려움을 잘 헤쳐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로 인해 문제 해결은 물론 기획력을 배울 수 있었고, 차곡차곡 실력을 쌓았습니다. 하지만 지위가 올라갈수록 다른 이의 조언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으로 고독한 결정을 내리고 그 책임을 져야하는 일들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나의 능력과 지혜만으로는 수시로 발생하는 다양한 일들을 현명하게 판단해 해결하기 벅찰 때가 많았습니다.

이때 저에게 힘을 주시고 지혜의 열쇠를 주신 스승님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절박한 순간, 기도를 통해, 신부님의 강론을 통해, 순간적인 영감을 통해, 하느님은 ‘해결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 은총으로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군생활을 영예롭게 마칠 수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데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만큼 크나큰 은총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비록 눈에 보이지도 않고 실체를 알 수도 없지만 성령을 통해 필요할 때마다 저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주님은 눈먼 저를 인도해주시는 영원한 스승이자, 구원자이십니다.

이연세 (요셉) rn예비역 육군 대령rn동서울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