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방주의 창] 중독 치료를 넘어서 치유와 영성으로 / 하종은

하종은(테오도시오)rn카프성모병원 알코올치료센터장
입력일 2017-11-21 수정일 2017-11-21 발행일 2017-11-26 제 3071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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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은 과녁에 꽂히는 것이 최종 목표다. 알코올 중독 치료에서 ‘과녁’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대부분은 술을 끊는 것이라 답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중독 환자들을 치료하다 보면 정작 술을 끊는 데서 문제가 시작되는 것을 본다. 우선 술을 끊으면 금단증상이 생겨 불안·불면, 심한 짜증과 억제하기 힘든 분노가 몰려오기도 한다. 술이 채워준 쾌락과 잠시 잊은 스트레스 자리에 우울감·무력감이 자란다. 술에 대한 갈망, 맨 정신에도 술 취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마른 주정’, 감정과 사고가 왜곡되는 중독성 사고는 원하는 대로 술을 마시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대표적 증상이다. 중독 치료의 최종 목표로 가는 길에 만나는 이런 고통은 술의 유혹에 굴복하면 일시적으로나마 사라진다. 알코올사용장애 환자 중 절반 정도가 한 달 내에 재입원하고 3분의 2정도가 1년 안에 재발한다는 통계도 있다. 그만큼 회복으로 향하는 것이 쉽지 않은 과정이다. 재발이 얌전하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재발할 때마다 크고 작은 갈등과 사건·사고, 내외과적 응급질환, 자살시도 등의 문제가 일어나는데도 다시 술을 입에 댄다. 잠시나마 모든 것을 잊을 수 있기에 다시 술잔을 기울인다는 환자들의 변명은 어리석을지언정 새빨간 거짓말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한 걸음 뒤에서 보면 어리석게 보이는 행동에는 원인이 있다. 우선 오랜 기간 술을 즐겨왔던 뇌는 주기적으로 술이 주어지는 것을 정상으로 인식한다. 갑자기 술이 사라지면 뇌는 비상 상황으로 간주한다. 비정상적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뇌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인을 몰아세운다. 어떻게 해서든 술잔 잡을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는 것이다. 더욱이 중독은 영성을 파괴한다. 자극적 쾌락과 참기 힘든 고통에 즉각적 반응을 하면 자연스레 영적 능력은 상실된다. “2년 이상 단주를 한 사람의 80%는 평생 재발하지 않는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단주 1~2년이 지나면 뇌 기능 상당 부분이 회복되고, 술을 먹지 않는 생활에 익숙해져서 갈망감에 시달리거나,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어 좌절하는 일이 훨씬 적어질 것”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환자는 당장의 곤란함과 눈앞에 마주한 어려움 때문에 흘려들을 뿐이다.

얼마 전 여든이 넘은 노신사 한 분을 만났다. 중독을 극복하기 위해 매주 의사를 찾고 단주 모임에 참석하며 어려움을 넘기는 그분을 보노라면, “마시면 몇 년이나 더 마신다고. 이대로 살다 저 세상 가게 날 내버려달라”며 단주를 바라는 가족의 바람을 외면하던 동년배 다른 환자들 모습이 떠올랐다. 노신사에게 왜 단주하고 싶은지 물었다.

“술에 빠져 산 세월이 60년은 되는 것 같습니다. 부지런히 살았는데, 어느 순간 내게 남은 것이 없다는 공허함이 들었습니다. 일을 해 돈을 벌고, 술로 시간을 허비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요. 사실 가족들과는 제대로 된 대화도 못하고 살았습니다. 결국 가족들 기억에 가치 없는 삶을 산 주정뱅이로만 남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단주하고 악기도 배우며, 운동도 하고, 책도 읽고, 종교생활도 합니다. 무엇보다 저를 피하던 가족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원하고 대화도 많이 늘었습니다. 비로소 가족에게 제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가족은 제가 많이 변했다며 존중하고 칭찬해줍니다. 단주를 1년 했는데 60년간 못 했던 것들을 누리고 있습니다. 어느 날 제 인생이 끝나도 가족들에게 의미 있는 삶을 살다 갔다고 기억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의료인으로서, 치료자는 환자가 쾌락 대신에 건강한 즐거움을 바라고, 중독 물질을 통한 순간의 망각 대신에 건강한 위로를 누리고, 치미는 분노 대신에 온전한 의사소통을 추구하고, 본능적인 욕구에 지배받는 대신에 희망을 간직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한 삶을 살도록 돕기를 바란다. 이것이 중독 치료가 가닿아야 할 최종 목표다. 모든 중독자들이 단순한 해독만이 아니라 온전한 치유와 진정한 영성의 회복에 다다르기를 기도한다.

하종은(테오도시오)rn카프성모병원 알코올치료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