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나를 따라야 한다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
입력일 2017-11-21 수정일 2017-11-21 발행일 2017-11-26 제 3071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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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닮았기에, 내 사랑 당신을 향합니다
우리 본래 모습은 하느님의 모상
‘너 중심’ 파스카로 행복감 느껴

찬미 예수님.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도생활, 영성생활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나 중심에서 너 중심으로 파스카 하는 여정에 대해서 계속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너 중심, 너 중심 하며 그리로 가야 한다고 자꾸 말씀을 드리는데, 어떠세요? 정말 너 중심의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그렇게 살아가고 싶으세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더러 당신 뒤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시죠. 예수님 사신 모습처럼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하고, 그 버리는 것도 그냥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면서 하게 되는 것인데, 그 길을 정말 가고 싶으십니까?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지난여름 청년성서모임 연수에 지도봉사자로 들어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은총의 시간이었지요. 하느님 말씀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고 그 생명력에 취해 기뻐하는 청년들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그리고 그들 사이에 살아 움직이는 하느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특히 제게 인상 깊었던 것은 연수생들보다는 연수 봉사자로 참가한 청년들 모습이었습니다. 학생들과 직장인으로 이루어진 그들은 두 달여의 준비 기간 동안 아낌없이 자신의 시간과 마음, 정성을 내어주면서 연수를 준비했는데, 그 준비 일정을 보고서 제가 깜짝 놀랄 정도였지요. 정말 이들이 무엇을 바라기에 이처럼 자신의 많은 것을 내어주면서 연수 봉사자로 참가하는 것일까, 준비기간 내내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준비기간 동안 그들의 달라지는 모습, 그리고 3박 4일의 연수를 함께 보내면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연수생들도 봉사자들도 다들 아름답게 빛나는 청년들이었습니다. 물론 각자의 모습, 사정이 다들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한에서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면서 그 안에서 빛나는 모습들이었지요. 그런데 연수생들이 체험한 사랑이 연수기간 동안 봉사자들을 통해서 또 서로를 통해서 얻은 ‘받는 사랑’이었다면, 봉사자들이 체험한 사랑은 자신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있는 힘껏 연수생에게 내어주고자 했던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을 받을 때도 사람이 아름답게 빛나지만, 사랑을 할 때, 사랑을 줄 때 훨씬 더 아름답게 빛난다는 것을 그들을 보며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체험을 우리는 일상 안에서 합니다.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고 이태석 신부님이나 마더 데레사 성녀의 삶을 보면서 우리는 마음의 감동을 깊이 느끼게 되죠. 비록 그들과 똑같이 살 용기는 내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런 삶이 정말 의미 있고 참된 삶이 아닐까 되묻고 동경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거창한 내어줌이 아니더라도, 어느 날 누군가에게 자신의 무언가를 내어주는 경험을 하게 될 때, 그 안에서 우리는 스스로 뿌듯함과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신기해하면서도, 스스로를 기특해 하고 혼자 벅찬 마음으로 미소를 짓게 되죠. 다른 이에게서 무언가를 받는 것도 좋고 기쁘지만, 그보다 자신의 것을 내어줄 때 그 기쁨이 더 오래간다는 것을 종종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신가요? 만일 그렇다면, 왜 그럴까요?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지어졌고, 비록 원죄로 인해 그 닮은 모습이 훼손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금 그 모상성을 회복할 수 있는 구원의 길이 열렸다고요. 그래서 우리 모두는 그 길을 가고 있다고요.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하느님을 닮은 모습’, 우리 안에 있는 모상성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초세기 교회의 교부들부터 시작해서 많은 신학자들이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과 해석을 내 왔지만, 사실 이 또한 하나의 신비인 만큼 우리 인간의 지성으로 온전히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조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저는 우리 안에 담겨져 있는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모습은 바로 너 중심으로 움직이려는 경향성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실은 이것도 너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전적인 ‘너 중심’ 자체시라면, 하느님과 비슷하게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우리 인간도(창세 1,26 참조) 너 중심의 모습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원죄 결과로 인해 인간이 너 중심의 방향성보다는 나 중심으로 움직이게 하는 욕구들에 더 끌리게 되었지만(죄로 기울어지는 경향),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본래 모습이 너 중심이신 하느님을 닮아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 곧 나 중심에서 너 중심으로 건너간다는 것은 그렇게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데, 가면 좋다니까 억지로 가는 여정이 아닙니다. 너 중심으로 파스카 해나간다는 것은 결국에는 우리의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자신에게서 벗어나다 보면 결국에는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는 것 아니냐고 물으시는 분도 계십니다. 그럴 것 같기도 하죠. 하지만 너 중심의 모습이 하느님께서 지어주신 원래의 우리 모습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자기 자신을 버리는 이 여정이 결국에는 본래의 ‘나’로 돌아가는 여정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에서 더 큰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생긴 모습이 그렇기 때문이라는 거죠. 나에게 주어지는 사랑, 나를 위한 사랑도 좋지만 그보다는 다른 이에게 내어주는 사랑을 할 때 훨씬 더 큰 기쁨을 느끼는 것이 원래 우리의 본모습인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따라 너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은 다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요한 14,27 참조), 세상이 주는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으로 인해 주어지는 행복(마태 5,3-12 참조)을 얻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가 원하고 자유롭게 선택하는 삶의 모습인 것이죠. 그렇기에 그 안에서 겪게 되는 십자가의 어려움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이 주는 기쁨과 행복도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근원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덧없이 지나가고 그래서 ‘부질없게’ 느껴지는 기쁨이라는 것을 우리 마음 저 깊은 곳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어떠십니까? 너 중심의 삶을 살고 싶으신가요?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싶으신가요?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