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방주의 창] 교회가 사회 조직과 다른 이유 / 송용민 신부

송용민 신부 (주교회의 사무국장·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입력일 2017-11-14 수정일 2017-11-14 발행일 2017-11-19 제 3070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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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의식은 교육과 전통, 문화와 신념체계에 따라 달라지지만, 의식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고 성장하며 통합되기도 한다. 또한 변화는 언제나 저항을 낳는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고통을 피하고, 안락한 삶에 안주하려는 본능을 갖고 있기에,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신체적 고통은 물론 내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정서 안정 시스템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개인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와 부합하면 개인은 변화에 따른 고통을 감내할 수 있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도태되거나, 사회의 부적응자로 낙인찍히고, 사이코패스와 같은 반사회적 폭력을 일으키거나, 자가당착에 빠져 우울증과 자살 충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2천 년의 역사를 지닌 가톨릭교회가 걸어온 역사를 뒤돌아보면, 시대의 정신과 문화 속에서 신앙을 이해하고 선포하면서 교회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문화 적응과 토착화의 여정을 걸어왔다. 초기 예수님 부활체험 이후 종말과 재림을 기다리던 교회는 순교로 믿음을 증언했고,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에는 세상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 이민족과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가 막강한 세속적 권력을 가졌을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폭력과 부당한 판단으로 사람들을 굴복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교회 역시 큰 변화를 거치며 쇄신과 개혁을 추진했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성령의 인도로 “저승의 힘도 이길 수 없는” 교회가 되어 세상 곳곳에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복음을 선포해왔다. 서구 문명의 옷을 입고 넘어온 가톨릭교회가 한국 땅에 정착하면서도 민족의 한(恨)과 만나 부활의 희망의 언어가 됐고, 신자들은 교회 안에서 새로운 가족을 찾고, 위로와 격려를 나누며 때로는 순교로 희망의 증인이 됐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말이 있다. 언뜻 생각할 때 부분의 합이 전체라고 여겨지지만, 개인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룰 때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아 개체가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던 행동이나 능력이 생기게 된다고 한다. 이를 ‘창발성’의 원리라고 하는데, 모든 생명체가 지닌 이러한 놀라운 현상은 우리 신앙 공동체인 교회에서도 체험된다. 신자 각자가 성령께 받은 은사는 작고 보잘것없지만, 교회 안에서 이 은사가 모여 진리를 찾고 실천하는 과정 속에 개인의 능력을 넘어서는 성령의 은사가 공동체에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 교회는 일반 사회 조직이 지닌 공동체의 원리보다 더 높은 차원을 지향한다.

전체가 개인의 합보다 크다는 논리가 일반 사회에서는 흔히 여론몰이나 미디어의 편향성으로 개인을 거짓과 왜곡된 가치관에 물들게 하고 전체의 신념과 가치관을 개인에게 주입시켜 희생을 강요하기도 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개별 신자들은 복음을 향한 직관과 본능인 ‘신앙 감각’을 통해 교회 안에서 친교를 나누며 하나가 될 때 개인의 은사를 넘어 교회를 지키고 성장시키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함께 올바른 진리를 식별하고 거짓을 피하며 보편적인 공동선을 지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세상의 조직과 다를 바가 없다고 비난하고 함부로 폄하하는 신자들이 늘고 있지만, 교회는 세상과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

이른바 ‘대조사회로서의 교회’(게하르트 로핑크)가 오늘날 필요한 것은, 교회의 존재 이유는 권위적이고 체계적인 세속적 질서에 스스로 갇혀 성공 신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진리가 있음을 전하는 것이다.

권위가 권력이 되는 순간 교회 역시 세속의 집단과 다르지 않게 된다. 십자가를 잃으면 교회도, 신앙도, 나도 잃어버린다는 것이 역사가 가르쳐준 교훈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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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용민 신부 (주교회의 사무국장·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