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순교자를 만나다] 복자 이현(안토니오)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7-11-07 수정일 2017-11-07 발행일 2017-11-12 제 3069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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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교 발언 회심하고 최후까지 신앙 고백
한양에서 기도 모임 동참
교회 서적 발각돼 모진 문초

복자 이현(안토니오) 초상화.

이현(안토니오) 복자는 삼촌 이희영(루카)을 따라 배운 교리를 지키며 순교로 믿음을 증거한 신앙선조다.

복자는 경기도 여주의 양반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797년 삼촌 이희영이 살고 있는 김건순(요사팟)의 집을 드나들면서 교회서적을 빌려보며 교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복자의 삼촌인 이희영은 서양화법을 조선화에 도입한 화가로, 성화와 상본을 그린 작가로도 유명하다.

복자의 신앙이 더욱 깊어진 것은 한양으로 가 홍필주(필립보)의 집을 찾으면서다. 복자는 홍필주의 집에서 교리를 더욱 깊이 공부하고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또 홍필주를 비롯해 정광수(바르나바), 최필제(베드로) 등의 신자들과 교류하면서 교리를 실천하고 기도모임에 열심히 동참했다. 그러면서 홍익만(안토니오)의 딸과 혼인했다.

복자가 교회의 일에 봉사하고, 친척과 친구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전해왔기에 박해가 시작되기 전부터 박해자들의 명단에 복자의 이름이 올라있었다. 마침내 1801년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복자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체포돼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그의 삼촌 이희영은 이미 체포돼 사형됐다.

복자는 압송 당시에 집에 숨겨둔 교회서적들이 발각돼 다른 신자들보다도 더 많은 문초와 고문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지독한 문초와 형벌 속에서도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고통 중에 마음이 약해져 “신앙을 버리고 마음을 고치겠다”는 말을 꺼내기는 했지만, 다른 신자들을 밀고하지는 않았다.

심문 중 신앙을 버리겠다는 말을 한 복자는 형조로 이송된 후 잘못을 깊게 뉘우치고 신앙을 지키고 순교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박해자들의 어떤 강요와 형벌에도 복자는 흔들림 없이 신앙만을 고백했다.

복자는 사형을 앞두고 최후 진술에서도 “4년 전부터 동료들과 함께 교회서적을 읽으면서 (교리에) 깊이 빠졌다”면서 “여러 해 동안 천주교를 믿어왔으니 이제 아무리 형벌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신앙을 믿는 마음을 바꾸지는 않겠습니다” 하고 굳은 믿음을 밝혔다.

복자는 1801년 7월 2일 한양의 서소문 밖의 형장에서 참수를 당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날 순교한 4명의 순교자들의 시신은 무덥고 비가 오는 중에 여러 날 동안 현장에 방치됐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부패되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순교자들의 얼굴은 여전히 홍조를 띠고 있었고, 흘러내린 피도 굳지 않았다고 한다.

■ 발자취 만날 수 있는 곳 - 여주성당

여주성당과 본당 부설 소화유치원 전경.

성당 옆에 있는 순교자현양비.

여주는 복자가 태어난 곳이자 신앙을 배우고 익히기 시작한 곳이다. 용인대리구 여주본당은 성당 옆에 순교자현양비를 세우고 복자를 비롯한 17위의 여주 출신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