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신앙살이 세상살이] (408) 할아버지와 족보 (하)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rn
입력일 2017-10-31 수정일 2017-10-31 발행일 2017-11-05 제 3068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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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를 보러 할아버지 집을 찾아간 신학생 손자. 그러나 30살이 넘은 손자에게 ‘너는 아직까지 성인이 아니니 집안의 족보를 볼 수 없다’는 말을 하신 할아버지. 몰래 조카에게 ‘족보’를 보여준 큰아버지. 뭔가 비밀 이야기를 들려주시려는 할머니. 아무튼 ‘족보’ 보는 숙제를 하러 간 그 형제는 진지한 표정으로 방에 들어오신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았습니다.

“얘야, 너의 할아버지를 원망하지는 말아라. 사실 할아버지는 너희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의 창설자인 방유룡 신부님께서 황해도에서 사목하시던 그 본당에 어릴 때부터 다니셨단다. 신부님께서 수도회를 설립할 때에도 존경과 기도의 마음으로 함께 하셨어. 평소 할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 너희 수도회 창설자 신부님은 대단히 훌륭한 성인 신부님이라고. 하지만 할아버지는 당신의 가족만큼은 그 수도회에 보내고 싶어 하지 않으셨단다. 왜냐하면 그 신부님은 젊을 때부터 신자들에게는 하염없이 자상하셨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너무나 철저하고 엄격한 삶을 사셨던 분이었거든. 할아버지 생각에, 그 신부님께서 만드신 수도회의 수사님, 수녀님들은 너무나도 힘들게 살 것이 뻔하기 때문이라고. 외아들인 네가 커서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할아버지는 찬성도 반대도 안 하셨어. 그런데 네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소속으로 신학교에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할아버지는 무척이나 큰 충격을 받으셨단다. 네가 신학교 가던 그 해에 할아버지가 너의 아버지를 이곳으로 호출했고, 그런 다음 할아버지는 네 아버지를 엄청나게 야단쳤단다. 혹시 아버지가 그 이야기를 하더냐?”

그 형제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너무 놀랐습니다. 우선 자신의 할아버지가 수도회의 창설 신부님과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답니다. 할아버지가 그토록 자신이 수도회로 가는 것을 반대하셨다는 것도 몰랐고요. 아버지가 자신 때문에 할아버지로부터 그토록 야단을 맞았는데도 자신은 전혀 그런 사실은 듣지도 못했고요. 오히려 그 형제의 아버지는 집안 식구들 모두가 자신이 선택한 부르심의 길을 축복하고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형제의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얘야, 지금 그 생활이 힘들면 언제든지 나와도 좋단다. 하지만 그게 네가 가야 할 길이라면 주변 사람들 개의치 말고 꿋꿋이 너의 길을 가렴. 언젠가 네 할아버지도 네가 수사신부가 되는 것을 축하해 줄 때가 올 거야. 할아버지가 저래도 속마음은 안 그래. 알겠지?”

그 형제는 그 날 단지 신학교에서 요구한 과제물을 제출하러 ‘문자’로 된 족보만 보러 갔던 것뿐인데…. 그런데 ‘족보’를 넘어, 과거 자신으로 비롯된 ‘얽히고설킨 가족사’와 성소의 길을 가기 전에 있었던 숨겨진 이야기를 상세하게 듣게 된 것입니다.

한편으로 자신이 속한 수도회의 창설 신부님과 친할아버지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는 것 자체가 지금은 뿌듯한 위로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형제는 지금도 말합니다. 언젠가 할아버지께서 직접 자신에게 ‘족보’를 보여 줄 그 날을 기다린다고. 그 형제는 지금도 할머니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꿋꿋이 수도 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