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민족 화해 일치]북녘을 향한 내 맘속의 자리 / 손서정

손서정(베아트릭스) 평화활동가
입력일 2017-10-24 수정일 2017-10-24 발행일 2017-10-29 제 3067호 22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북한을 향해 내 맘속에 자리를 내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3년 전 즈음, 고요함 속에 기도를 하는 중이었다. 나는 매일 새벽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라는 묵상방법을 응용해 성경을 읽고 한 단락씩 천천히 써 내려가며 기도와 묵상을 한다. 그날 묵상한 구절이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가난한 자와 억압된 자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 네팔의 한 어린아이를 단체를 통해 후원하고 있었던 나에게 기도 중에 들려온 뚜렷한 목소리가 있었다. ‘너는 더 멀리 있는 아이에게도 사랑을 주면서 왜 너의 형제, 북녘땅에 있는 더 가까이에 있는 아이를 보지 못하느냐’ 그 목소리는 꾸짖음도 아니고 질책도 아니었으며, 급속히 흐느낌에 솟구칠 수밖에 없는 애원이었고 어느새 나의 노트는 눈물로 뒤범벅이 됐다.

아이, 그 사랑스럽고 자그마한 존재가 간직한 순수와 자연스러운 통찰과 지혜는 존경스럽다. 나의 태 안에 직접 아이를 간직하면서부터 그 경이로움에 대한 감탄과 사랑이 시작된 것 같다. 아이에 대한 사랑은 모든 엄마들이 가지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온전히 먹이고 돌봄에 집중해 살펴야 하는 영유아기에는 그 지평이 나의 아이에게만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아이가 놀이터와 학교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아이의 친구인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아이가 학교에서 가져온 국제구호기관의 영상과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무시할 수 없게 됐다. 아이의 할아버지는 아이가 밥그릇에 밥풀을 붙여놓은 채로 식탁에서 일어나면, 농부의 땀방울에서 시작해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는 아이들을 얘기하신다.

1990년대 수백 만의 동포들이 북녘땅에서 굶어 죽고 아이들은 영양실조로 자연스러운 발육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남쪽에서 사는 우리의 아이들은 점점 더 비만에 노출되고 인공적으로라도 키를 키우기 위해 한 대에 100만 원에 이르는 성장 주사를 몇 년씩 맞기도 한다. 수조 원의 음식물쓰레기를 배출하는 우리에 대한 반성은 가까이에 있는 아이들보다는 먼 나라를 조명한다.

우리에게 보여지는 북한은 70여 년 전에 이념으로 분단되고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생명을 빼앗은 나라이며, 오늘도 여전히 핵무기를 개발해 한반도 전체를 전쟁의 위협으로 몰아가는 체제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야 할 북한은 체제와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외세가 갈라놓은 땅에 그저 머물러 살아남아야만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땅에는 현재와 미래의 우리 아이들로 가득 차있다.

유엔 발표에 따르면 북한의 식량난은 여전히 ‘심각한’ 상태이고, 북한주민의 기아지수는 2000년대 이후 다시 계속 증가추세다. 최근 더욱 강력해진 대북제재는 오히려 더 많은 아이들을 식량 위협에 몰아넣고 있다. 국제사회가 정한 ‘인도주의적 지원은 언제든지 보장돼야 한다’는 조항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인간으로서 우리는 언론이 보여주는 피상적인 정치보다 우리의 삶에 살아 꿈틀대는 인간, 부모로서의 돌봄의 본능을 들여다봐야 한다.

손서정(베아트릭스) 평화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