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방주의 창] 우리에게 희망은 있다 / 하종은

하종은(테오도시오) 카프성모병원 알코올치료센터장
입력일 2017-10-24 수정일 2017-10-24 발행일 2017-10-29 제 3067호 23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알코올 중독은 죽어야 낫는 병인가 봅니다. 차라리 곱게 죽어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죽어야 끝이 날 것 같단다. 중독자를 옆에서 지켜온 가족의 탄식이다. 수년간 환자가 쏟아내는 숱한 거짓말과 분노 때문에 좌절해왔을 가족의 절망 섞인 말은 처절한 절규처럼 들린다. ‘절망’의 병, 중독은 이렇게 쉽게 좌절을 향한다. 중독으로 고통받는 당사자의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그 가족 또한 우울증이나 심한 불안증에 빠지게 만든다. 서로를 원망하다 못해 가정의 붕괴로 이어진다. 자녀들의 인생이 망가지고 중독이 대물림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어디 이뿐이랴.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들도 절망한다. 단주가 간절하다며 눈물을 흘리던 환자가 퇴원 후 몇 개월 만에 고주망태가 되어 다시 병원으로 돌아오거나, 심지어 술에 취해 의사를 가만두지 않겠다며 강도 높은 협박을 할 때도 있다. 심지어 중독자의 보호자가 찾아와 환자의 사망 소식을 전할 때면 그 착잡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진짜 죽어야 끝나려나…. 중독자를 돕는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 병을 극복한 환자들과 이를 지켜본 의사들은 한결같이 중독은 ‘희망’의 질병이라고 이야기한다. 국내 한 연구에 따르면, 중독자 가운데 50~60%는 퇴원 이후 3개월 내에 재발한다. 1년간 단주를 유지하는 사람의 비율은 15% 정도에 불과하다. 10명 중 1~2명만이 성공적으로 술을 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주목할 만한 사실이 숨겨져 있다. 그 10명 중 1~2명은 정말 술을 끊더라는 것이다.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2년 이상 단주를 유지한 사람이 10년간 단주를 유지하는 비율은 80%나 된다는 것이다.

중독의 긴 터널에 갇혀 있는 동안 회복은 멀고 아득하다. 단주를 시작하고도 몇 개월은 여전히 그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1년 정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단주를 유지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설사 이번에 실패하더라도 다시 용기를 낼 수 있다면 적어도 10명 중 1~2명이 될 수 있는 희망과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

“저는 제가 중독에 빠졌던 것을 주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주에 2년 정도 성공한 중년의 회복자가 건넸던 말이다. 무슨 말인가 하니, 중독자가 되기 이전 자신의 삶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벌었지만 스트레스를 관리하지 못했고, 삶의 지향점도 잃어버렸다. 주변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기 일쑤였고, 가정에서나 회사에서나 자신의 가치를 찾을 수 없었다. 중독에 빠진 다음 이 모든 문제가 폭발해버렸다. 그는 밑바닥까지 떨어진 다음에 비로소 치료와 단주를 결심했다. 술을 끊는 과정은 인생의 성숙을 도모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았고 술을 끊고도 남아 있는 세상에 대한 원망, 분노, 인생에 대한 회의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전문가나 동료들과 맨정신에 대화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회복에 가까워질수록 인생관과 가치관도 회복되어 갔다.

“제가 중독에 빠지지 않았다면 제 삶을 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가족과 지인들을 탓하며 인생을 허비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중독이라는 병을 통해 나 자신을 먼저 변화시키고 성숙하는 것에 집중하니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그렇게 중독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나 자신과 더불어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인생을 누리게 된 기분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날, 제자들의 절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악한 세력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절망의 순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 세상에서 정점을 찍는 순간이었고, 밝아오는 부활을 위한 필연의 과정이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은 고통의 십자가를 패배와 좌절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저 십자가의 쓰라린 고통을 뚫고 부활의 여명은 밝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떤 절망의 순간에도 포기하지 말자. 절망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 법이다.

하종은(테오도시오) 카프성모병원 알코올치료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