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순교자를 만나다] 복자 강완숙(골룸바)

최용택 기자
입력일 2017-10-24 수정일 2017-10-24 발행일 2017-10-29 제 3067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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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첫 여성회장… 주문모 신부 피신에 큰 역할
자신의 집을 주문모 신부 피신처로 
이사 자주 다니며 신자 집회 장소로 활용

복자 강완숙(골룸바) 초상화.

복자 강완숙(골룸바)은 한국교회의 첫 ‘여성회장’으로 남녀차별이 극심했던 조선의 유교 질서 속에서 신앙에 대한 열정으로 참된 삶을 추구한 실천가였다.

충청도 내포 지방 양반가에서 태어난 복자는 어릴 때부터 지혜롭고 정직해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다. 복자는 덕산 지방에 살고 있던 홍지영의 후처로 들어갔다.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복자는 이후 천주교 교리서를 통해 그 신앙의 위대함을 깨닫고 열정적으로 천주교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1791년 신해박해가 발생하자, 복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신자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며 보살폈고 이 일로 자신이 옥에 갇히기도 했다.

복자는 시어머니와 홍지영의 전처 소생 아들 홍필주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켰다. 홍필주는 지난 2014년 복자와 함께 시복됐다. 하지만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입교시킬 수 없었고, 오히려 신앙생활에 방해가 됐다.

복자는 신앙생활에 충실하기 위해 시어머니, 아들 홍필주와 함께 한양으로 올라왔다. 이후 성직자 영입운동이 일어나자 경제적인 뒷받침을 맡았다.

1794년 복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복자는 주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그를 도와 활동했다. 복자의 재능과 신앙을 눈여겨 본 주 신부는 그를 여회장으로 임명해 신자들을 돌보게 했다.

1795년 주 신부의 입국 사실이 드러나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복자는 자신의 집을 주 신부의 피신처로 내놓았다. 복자는 주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자주 이사를 다녔으며, 그때마다 그 집은 신자들 집회 장소로 이용됐다.

복자는 위험도 마다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는 데에도 열심이었다. 역모죄로 몰락한 왕실 친척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가 세례를 받게 된 것도 복자의 노력 덕분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복자는 4월 6일 식구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관헌들은 주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복자에게 여러 차례 혹독한 형벌을 가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복자는 3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동료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며 순교를 준비했다.

사형 판결을 받은 복자는 그해 7월 2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사형 판결을 받았을 때 복자의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이미 천주교를 배웠고 스스로 ‘죽으면 즐거운 세상(즉 천당)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비록 형벌을 받아 죽게 될지라도 (천주교를) 믿는 마음을 고칠 생각은 조금도 없다.”

■ 발자취 만날 수 있는 곳 - 어농성지

어농성지에 있는 복자 강완숙의 가묘.

교구 내 성지 중에는 어농성지(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어농로62번길 148)가 복자를 현양하고 있다. 어농성지에는 복자의 가묘가 조성돼 있다.

이외에도 어농성지는 복자 주문모 신부를 비롯해 파평 윤씨 집안의 순교자들과 같은 지역에서 활동하고 순교한 이들을 현양하고 있다.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