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순교자성월 특집] 일상 속 키워드로 만나는 신앙선조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7-09-19 수정일 2017-09-19 발행일 2017-09-24 제 3063호 11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한국 천주교 초기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두메산골에 숨어 살며 옹기를 구워 팔아 생계를 연명했다. 하루 한 끼 배불리 먹기 힘든 열악한 상황에서도 선조들은 엄격하게 재를 지켰다. 출처 「전동 100년」 기념화보집

혹독한 박해시기 신앙선조들은 어떻게 살아갔을까? 순교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사건이지만, 이는 평소의 삶이 늘 하느님을 향했기에 가능했다. 이 땅에서 살았던 신앙선조들의 삶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 있는 생활 속 도구 혹은 먹을거리 등에서도 느껴볼 수 있다.

정약종이 천주교의 기본 가르침을 순 한글로지은 「주교요지」.

■ 책 - 선교사 대신 신앙 전래 큰 역할

우리 신앙선조들이 선교사도 없이 단지 책을 통해 먼저 하느님을 알게 됐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신앙선조들은 어떤 박해에도 불구하고 각종 서적들을 아끼고 보호했다.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은 박해가 거세지자 가족들과 함께 순교를 각오하고 성패와 성물을 감췄다. 그런데 신심서적은 감추지 않자, 조카 최 요한이 놀라 “다른 교우들은 혐의를 받을만한 것을 모두 감추는데 이 책을 그렇게 내어 두십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최경환 성인은 “성물은 불경한 무리들이 더럽히지 못하도록 감췄지만, 서적이야 어디 강복한 물건이냐? 군사가 전쟁 때에 병서를 참고하지 않고 대체 언제 하겠느냐?”라고 대답했다.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은 교회 가르침을 설명하는 한글서적 「주교요지」를 편찬해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에게 보급했고, 복자 최창현(요한)은 한문으로 된 신앙서적들을 한글로 번역하기도 했다.

■ 과일 - 미사 봉헌 위해 포도 재배 시작

과일에도 순교자의 일화가 숨어 있다.

8~10월 주로 수확하는 ‘포도’는 가히 순교자의 과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포도를 들여와 수확한 이들이 순교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복자 윤유일(바오로)은 성직자 영입을 위한 밀사로 1790년 베이징에 파견돼 구베아 주교를 만났다. 구베아 주교는 선교사 파견을 약속하면서, 복자에게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했을 때 사용하도록 미사도구와 함께 포도나무 묘목과 그 재배법도 줬다. 이 묘목으로 재배한 포도는 1795년 예수 부활 대축일 주문모 신부가 조선 땅에서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할 때 사용됐다.

곶감으로 만들어 장기간 저장할 수 있는 ‘감’은 산속 교우촌에서 식량을 구하기 어려운 신자들에게 소중한 먹을거리였다. ‘경북의 사도’라고도 불리는 강 칼래(Calais) 신부의 선교체험기에는 순교자와 곶감을 나누던 일화가 기록돼 있다. 복자 박상근(마티아)은 병인박해를 피해 한실 교우촌을 향하던 칼래 신부를 염려해 함께 길을 나섰다. 하지만 칼래 신부는 오히려 박상근의 안위를 염려해 그를 억지로 돌려보냈는데, 당시 둘이 눈물을 흘리며 나눈 마른 과일이 바로 곶감이라고 전해진다.

「천당지옥도」. 19세기 경 중국에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 성화 - 생필품보다 아꼈던 ‘상본’

박해시대 신자들이 성화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최양업 신부의 서한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하느님의 종’ 최양업(토마스) 신부는 그의 스승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신자들은 상본이나 고상, 성패를 장만하기 위해서는 생존에 필요한 재산도 나눌 정도”라면서 상본을 보내주길 요청했다.

상본(像本)이라는 말도 우리 신앙선조들이 만들어낸 말이다. 이 말은 중국에서도 사용하지 않는 단어다. 신앙선조들은 성화를 뜻하는 말을 만들어낼 정도로 성화를 사랑했던 것이다.

또 1801년 신유박해 이후부터는 직접 성화를 제작했다. 복자 정광수(바르나바)와 복자 최창현(요한) 등은 성화를 그려 팔면서 신자들을 만나고 선교했다. 복자 이경언(바오로)도 성화를 모사해 보급했는데, 그가 만든 상본 50여 장이 전라감영에 압수됐다는 기록도 있다.

천주가사 중 중요 내용을 수록하고 있는 김지완본 「사주구령가」.

■ 노래 - 우리 전통 선율로 하느님 찬미

노래는 우리 신앙선조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박해시대 신자들은 전통 선율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교리를 되새겼다. 그 대표적인 노래인 ‘천주가사’는 조선교회 초기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던 노랫말이다. 형식이 가사인 만큼 음악적 요소도 가미됐다.

또 교회의 전례가 신자들 사이에 자리 잡으면서 우리 전통음악이 교회 예식 안에 들어오기도 했다. 연도(煉禱)가 대표적인 사례다.

노래를 부르다 체포돼 순교한 이들도 있다. 1800년 복자 최창주(마르첼리노), 복자 이중배(마르티노), 복자 조용삼(베드로), 복자 원경도(요한) 등은 예수 부활 대축일을 맞아 여주 양섬에 모여 부활삼종기도를 바치고 성가를 불렀는데, 이때 포졸들이 들이닥쳤고 이들은 순교하기까지 서로를 격려하며 신앙을 지켰다.

■ 담배 - 교우촌 생계에 도움 주던 작물

19세기 전반, 담배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주요한 기호품이었다. 담배는 다른 작물에 비해 수익률이 높은 편이었기에 소규모의 화전을 일궈 생계를 꾸리던 교우촌의 신자들에게도 인기 품목이었다.

최양업 신부는 스승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교우촌의 삶을 설명하면서 “열심한 신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육신과 세속의 모든 관계를 끊고 산속으로 들어가 담배와 조를 심으며 살아간다”고 밝혔다.

담배촌이라 불리던 안양 수리산 교우촌을 비롯해 전국의 많은 교우촌에서는 담배를 생산했다. 특히 경기 북부지역에는 1960년대까지도 ‘강림초’라는 말이 사용됐다. ‘강림초’는 교우촌 신자들이 성령 강림 대축일을 전후로 심은 담배를 부르는 말이었다. 이 담배는 품질이 우수해 시장에서 크게 환영받았고, 비신자들도 이 단어를 사용했다.

교우촌의 담배가 유명해진 것은 양날의 칼이 되기도 했다. 전주 진영의 포교들은 신리골 교우촌에서 담배농사를 하던 정문호(바르톨로메오) 성인을 붙잡기 위해 담배상인으로 위장했다. 성인은 이에 속아 잡혔지만, 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오늘 우리는 천국으로 과거보러 가는 날”이라면서 기뻐하며 순교했다.

한국교회 초기 프랑스 선교사들은 상복으로 변장해 생김새와 서툰 조선말을 숨길 수 있었다.

■ 상복 - 외국인선교사 변장에 일등공신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상복을 엄숙하게 갖춰 입어 죽은 이들에 대해 예(禮)를 표했고,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상복이 박해시대 때 신앙선조들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알렉산데르)은 상복을 입어 박해자들의 눈을 피했다. 당시 예법상 부모를 잃은 상주는 얼굴을 가려야 했고, 다른 사람과 말을 섞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상복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외모와 서툰 한국말을 감출 수 있도록 도와준 일등공신이 됐다.

선교사들은 “상중에 있는 양반의 복장과 예절은 쉽고 완전하게 변장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섭리 같다”고 말하곤 했다. 상복 없이 조선 땅에서 신자들을 찾아다니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