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순교자를 만나다] 복자 권상문(세바스티아노)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7-09-19 수정일 2017-09-19 발행일 2017-09-24 제 3063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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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권상문(세바스티아노) 초상화.

권상문(세바스티아노) 복자는 한때 교회를 멀리했지만, 다시 신앙의 열정을 찾고 하느님을 증거한 순교자다.

1769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복자는 우리나라 초기교회를 이끈 가문에서 성장해왔다. 그의 부친인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과 그의 백부인 권철신(암브로시오)은 천진암강학을 주도하며, 학문으로 받아들이던 교리를 신앙으로 발전시키고 교회 공동체를 형성한 이들이다.

학문으로 이름난 집안에서 태어난 복자는 집안의 전통에 따라 과거 공부에 열중했지만, 부친이 천주교를 받아들이면서 당시 청년이었던 복자도 과거를 위한 공부가 아닌 하느님을 알기 위한 공부에 몰두하게 됐다.

그러나 1791년 복자의 나이가 23세 되던 해에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복자의 신앙이 흔들리고 말았다. 조상 제사문제로 불거진 이 박해로 복자의 부친이 체포돼 형벌을 받고 유배길에 오르다 선종한 것이었다. 복자는 이 일로 신앙을 멀리하고 오직 집안을 일으키는 데만 집중했다. 또 집안의 요청에 따라 자손이 없던 백부 권철신의 양자로 입적했다

.

복자가 다시 열심한 신앙의 길로 돌아선 것은 1794년경이다. 하느님과 진리를 탐구하던 그는 차츰 신앙의 열정을 되찾았다.

마침내 복자는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해 활동하자 주 신부를 찾아갔고, 이를 계기로 신앙생활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또 양근지역의 조동섬(유스티노), 윤유일(바오로) 등과 교류하면서 교리를 전파하는데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1800년 6월 복자는 양근 옥에 갇히게 됐다. 복자의 열심한 신앙생활로 이미 주변에서 복자를 사학에 깊이 물들어있다며 배척해 왔었기에 아직 전국적인 박해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웃의 고발로 체포된 것이다.

복자는 이듬해 4월 전국적으로 신유박해가 일어나기까지 양근 관아와 감영에서 형벌과 문초를 당했다. 오랜 시간에 걸친 고난으로 복자는 집안의 내력과 자신의 행적에 관해 자백하기는 했지만, 포도청과 형조로 옮겨졌을 때는 다시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했다.

복자는 “끝까지 후회하지 않고 그대로 깊게 믿으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고 신앙을 고백했다.

결국 형조는 복자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알고 “생부 권일신이 사망한 뒤에도 천주교에 깊이 빠졌으며, 아울러 요사한 말과 글을 오로지 대중을 미혹시키는 데에 이용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형조는 복자의 고향인 양근 주민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복자를 다시 양근으로 이송, 처형을 집행했다. 복자는 1802년 1월 30일 33세의 나이로 양근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양근성지 순교자 조형물.

■ 발자취 만날 수 있는 곳 - 양근성지

양근성지(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물안개공원길 37)는 복자가 태어나고 성장했으며, 신앙생활을 하고 순교한 양근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성지는 복자를 비롯한 양근 지역의 신앙선조와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있다.

※문의 031-775-3357 양근성지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