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세상살이 신앙살이] (402) 순례와 좋은 만남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rn
입력일 2017-09-12 수정일 2017-09-12 발행일 2017-09-17 제 3062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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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고 있는 후배 수사님이 ‘순교자성월’을 맞이해 혼자서 순례를 다녀온 후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수사님, 오늘 특별한 일정을 잡아 순례를 다녀왔어요.”

‘특별한 일정’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생긴 나는 물었습니다.

“순례 자체가 은총인데 우리 수사님, 어떤 특별한 일정을 보내셨을까!”

“아, 특별하다는 건 다름 아니라, 나 혼자서 내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정을 했다는 뜻이에요. 며칠 전 이런 생각이 떠올랐거든요. 박해가 끝나고 종교의 자유가 오면서 한국교회는 외국인 선교사들과 한국인 성직자들의 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잖아요. 그리고 그분들은 선종하신 후 용산 성직자 묘지에 묻혀 있고요. 특히 외국인 선교사의 경우 타향인 이 땅에 묻혀 있는 거고. 이번 순교자성월엔 그 당시 선종하신 신부님들의 마지막 길을 따라가고 싶었어요. 그 당시엔 성직자들이 선종하면 명동대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봉헌한 후 용산 성직자 묘지로 갔잖아요. 그래서 오늘 아침, 명동대성당 가서 성체조배를 한 후, 용산 성직자 묘지까지 기도하며 걸었어요. 성직자 묘지에 도착해서는 한 분 한 분의 묘지 앞에서 기도했어요. 박해를 갓 벗어난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으며 교회 발전에 헌신했던 그분들의 삶을 묵상하는데 마음이 참 따스해지더군요.”

“아, 정말 좋은 시간 보냈구나. 감동인데! 그리고 그분들의 선교와 헌신했던 노력만큼이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어. 바로 그들 곁에는 언제나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에게 힘을 실어준 평신도 분들의 삶을 말이야. 그 당시 명동대성당에서 성직자들의 장례미사가 있을 때면, 성당을 가득 메우고 그 마지막 길을 눈물과 기도로 함께 했던 분들도 평신도들이었어. 그 모습을 보면서 다른 성직자들은 더욱더 힘을 내 신자들을 위해 헌신하며 살 수 있었지. 어쩌면 용산 성직자 묘지는 성직자들의 땀과 노력을 기억하는 장소인 만큼, 그들의 사목 현장에 함께 있으면서 그들이 좋은 사목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왔고 그들이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는 눈물과 기도로 함께 했던 신자들의 마음까지도 기억하는 공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좋은 순례를 했네. 그런데 꽤 긴 거리인데, 힘들지는 않았어?”

“아, 좋은 경험을 하나 했어요. 명동에서부터 용산까지 걷는데, 땀도 나고 갈증이 심하게 났어요. 어찌나 목이 마른지. 그런데 호주머니엔 버스 카드는 있는데, 지갑이 없는 거예요. 알고 보니 책상 위에 놓고 나왔어요. 그래서 그 갈증을 봉헌하는 마음으로 걸었어요. 순례를 다 마치고 성당 마당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연세가 지긋한 자매님 한 분이 나를 보더니, ‘형제님, 땀을 많이 흘리네. 여기, 물 한 잔 하세요!’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 말이 어찌나 고맙던지. ‘감사합니다’란 말을 반복하면서 물 한 컵을 받아 단숨에 마셨지요. 그 모습을 보고 측은했던지 한 잔 더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또 벌컥 마셨더니, 또 한 잔 더 주셨고요. 참 고마운 신자 분이셨는데! 맞아요, 하느님께서는 성직자 묘지에서 성직자들뿐 아니라, 평신도 그분들의 그 아름다운 마음까지 묵상하라고 그런 체험을 하게 했나 봐요.”

한국교회는 많은 성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순교자성월’이 되면 많은 분들이 그곳을 찾아 순례를 떠나기에, 성지가 순례자들에게 좋은 묵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