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염철호 신부의 복음생각] 십자가 기꺼이 지고 가리라

염철호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성서신학 교수)rn부산교구 소속으로 2002년 사제품을 받았
입력일 2017-09-12 수정일 2017-09-12 발행일 2017-09-17 제 3062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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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루카 9,23-26)

오늘은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 성인들을 기억하며 우리도 순교자의 정신을 본받아 각자의 자리에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사람만이 진정 목숨을 구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순교자의 정신을 본받으라고 권고하십니다.

하지만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순교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내세가 좋다 한들 현세를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예수님 때문에, 정의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내 목숨까지 내어놓아야 한다는 말은 왠지 불편한 마음을 가져다줍니다. 거기다 다른 사람들 대신 내가 목숨을 내어놓아야 한다는 것은 억울할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제1독서에서 지혜서는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지혜서는 또 하느님은 순교와 같은 시련으로 의인들의 신앙을 시험하시고, 단련하심으로써 의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드러나게 하신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의인들의 순교는 번제물처럼 하느님께 바쳐지고, 나중에 하느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 그들의 신앙이 빛을 내며, 모든 이들에게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주님과 함께 영원히 통치하게 될 것이니, 그들이야말로 억울한 죽음을 맞은 이들이 아니라, 주님께 선택받은 이, 주님의 은총과 자비를 가득히 입은 거룩한 이들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참된 자녀들은 하느님의 도움에 힘입어 모든 것을 이겨내며,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그들을 떼어 놓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 복음과 복음 환호송은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때 그들은 참으로 행복하다고 노래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만이 진정 세상 마지막 날 자신의 목숨을 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매번 순교자 축일 때마다 읽고 묵상하는 말씀들이지만, 나라면 과연 기꺼이 순교로 나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나는 정말 순교의 칼날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뻐할 수 있을까? 박해자를 미워하지 않고, 그들을 용서하며 모든 것을 신앙 단련으로 여길 수 있을까?

이런 우리에게 주님의 이 말씀은 조금이나마 위안이 됩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법정에 넘길 때, 무슨 말을 할까 미리 걱정하지 마라. 그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시는 대로 말하여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성령이시다.”(마르 13,11)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증언해야 할 것은 내 신앙이 아니라 예수님이며, 증언하는 이도 내가 아니라 성령이십니다. 사람들 앞에서 힘 있는 분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이 점을 잘 기억하고 모든 것을 아버지께 내어 맡긴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당장 코앞에 오지도 않은 박해 상황을 두고 고민에 빠질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상황 안에서 순교자들의 정신을 본받아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어 맡기고 자신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듯합니다.

염철호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성서신학 교수)rn부산교구 소속으로 2002년 사제품을 받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