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순교자를 만나다] 복자 박경진(프란치스코)·복녀 오 마르가리타 부부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7-09-12 수정일 2017-09-12 발행일 2017-09-17 제 3062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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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교우촌에 숨어 살며 신앙 지키다 함께 순교

복자 박경진(프란치스코) 초상화.

복녀 오 마르가리타 초상화.

박경진(프란치스코) 복자와 오 마르가리타 복녀는 하느님을 따르는 삶을 위해, 고향을 떠나 교우촌에서 생활하다 박해로 함께 순교한 부부 순교자다.

복자 부부는 원래 충청도 청주에서 교리를 접하고, 농사를 지으며 신앙생활을 해나갔다. 하지만 1866년 박해가 일어나자 이들은 부모와 아우 박 필립보, 조카 박 안토니오에게 “천주교인들에 대한 핍박이 심하니 고향을 떠나 조용한 산골로 가서 농사를 지으며 마음 편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박해자의 눈을 피해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신앙생활로 고향의 친척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신자인 가족들과 함께 산속에서 생활하고자 결심한 것이다.

가족의 동의를 얻은 부부는 충북 진천의 ‘절골’로 이주했다. ‘절골’은 현재 충북 진천군 백곡면 용진길 인근으로, 당시 배티를 중심으로 뿌리내리던 여러 교우촌 중 한 곳이다. 이 교우촌은 깊은 산속이면서도 마을에 다가오는 이들의 모습이 잘 보이고, 뒷산으로 도망가기 좋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교우촌 신자들은 옹기 제작이나, 숯막 운영, 화전 등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물론 그것만으로 생계를 꾸리기에는 부족해 생활은 늘 가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본래 농사에 종사하던 부부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게 여기며 살아갔다.

그러나 교우촌에서 행복하게 생활한 시간은 불과 2년 남짓이었다. 1868년, 박해가 더욱 심해지면서 배티를 비롯한 인근 교우촌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포졸들이 오는 것을 알아챈 복자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어린 자식을 업고 산을 오르던 복녀는 멀리 가지 못하고 숨어 있다가 포졸들에게 발각됐다. 복녀는 포졸들에게 모진 매질을 당했지만,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품에 안고 있어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깊은 산속에 숨어있던 복자는 가족의 소식이 궁금해 산에서 내려와 그 동네의 한 비신자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집주인의 밀고로 포졸들에게 잡혀, 복녀와 함께 죽산 관아로 끌려갔다.

부부는 갖은 형벌과 문초, 배교의 강요를 당했지만,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거했다. 순교를 각오한 부부의 정신은 복자가 동생 박 필립보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에서 살펴볼 수 있다.

복자는 편지를 통해 “우리는 먼저 주님을 위하며 죽을 터이니, 혹 너희가 잡혀 죽지 아니하거든 아무쪼록 네 조카를 위로하여 잘 지내고 부모께 효양하여 본분을 다하고 살다가 죽은 후 천국에서 영원히 만나게 하여라”고 전했다.

마침내 이들은 그해 9월 28일 죽산에서 함께 순교했다. 당시 복자의 나이는 33세였다.

■ 발자취 만날 수 있는 곳 - 죽산성지

죽산성지 순교자 묘역.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죽산성지(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종배길 115)는 복자와 복녀가 함께 순교한 순교터에 조성된 성지다.

또한 성지는 복자 부부가 옥중 생활을 했던 죽산 옥사터(경기 안성시 죽산면 죽산초교길 57-1 죽산면사무소)에 복자 부부의 형상이 담긴 순교자현양비를 세워 현양하고 있다.

※문의 031-676-6701 죽산성지 www.juksanshrine.org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