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순교자를 만나다] 복자 지황(사바)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7-09-05 수정일 2017-09-06 발행일 2017-09-10 제 3061호 3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성직자 영입 밀사로 활동… 주문모 신부 입국 도와

복자 지황(사바) 초상화.

지황(사바) 복자는 성직자 영입운동의 밀사로, 박해자의 눈을 피해 주문모 신부를 국내에 안내한 순교자다.

‘지홍’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복자는 1767년 한양의 궁중 악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복자는 조선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해서 교리를 배웠다. 복자가 정확히 언제 입교했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그의 아내 김영이(안나)가 1791년에 복자에게 교리를 배웠다는 사실에서 복자가 1791년 이전에 입교했음을 알 수 있다.

복자는 전교에 열심한 인물이었다. 본래 성격이 순직하고 부지런했던 그는 입교하자마자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만 열중했고, 하느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로 생활했다. 그래서 위험이나 고통에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복자는 1793년 이미 베이징을 다녀온 윤유일(바오로)과 박 요한과 함께 밀사로 선발돼 조선의 국경으로 갔다. 복자는 박 요한과 함께 동지를 전후에 중국으로 파견되던 사절인 동지사(冬至使)를 따라 베이징에 들어갈 수 있었다.

베이징에 도착한 복자는 당시 베이징교구장이었던 구베아 주교를 만나 조선교회의 사정을 전하고 선교사 파견을 요청했다. 또 복자는 베이징에 40일 동안 머물면서 견진성사와 고해·성체성사를 하면서 지냈다.

훗날 구베아 주교는 “우리는 1793년 지황의 신앙심을 목격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구베아 주교는 “그는 40일간 베이징에 머무르는 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견진과 고해와 성체성사를 아주 열심히 받았다”면서 “베이징의 신자들은 그의 신심에 감화를 받았다”고 말했다.

구베아 주교는 1794년 초, 주문모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했다. 복자는 주 신부를 만나 조선 입국을 위한 약속 장소를 정하고 각각 다른 길로 조선 국경을 향했다. 하지만 감시가 심해 바로 국경을 건널 수 없었다. 복자와 주 신부는 압록강이 얼 시기를 기다려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10개월 후 복자는 윤유일과 함께 국경을 찾아 주 신부를 1794년 12월 24일 의주로 잠입시켰다. 주 신부는 복자의 안내로 12일 만에 한양 최인길(마티아)의 집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성직자 영입의 기쁨도 잠시, 주 신부가 입국한 지 6개월 가량 지났을 때 박해자들에게 주 신부의 거처가 알려졌다. 주 신부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지만, 주 신부를 영입시킨 복자는 박해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신부의 행적을 쫓던 박해자들은 신부의 거처를 알아내기 위해 복자와 윤유일, 최인길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했다.

하지만 복자는 신부의 행적을 일체 말하지 않고 꿋꿋하게 신앙만을 고백했다. 결국 복자는 1795년 6월 28일 29세의 나이로 지독한 매질 속에 숨을 거뒀다.

■ 발자취 만날 수 있는 곳 - 어농성지

어농성지 십자가 동산.

어농성지(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어농로62번길 148)는 복자와 복자의 동료들, 복자가 영입시킨 주문모 신부 등의 순교자 의묘를 만들어 현양하고 있다.

※문의 031-775-3357 양근성지, 031-636-4061 어농성지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