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죄 이야기 -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
입력일 2017-08-29 수정일 2017-08-29 발행일 2017-09-03 제 3060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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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 주신 분
욕심과 이기심에 ‘참 행복’ 못 누려

찬미 예수님.

지지난주의 사욕, 지난주의 원죄에 이어서 오늘도 죄 이야기입니다.

어떠세요? 계속해서 죄 이야기를 들으시니까 마음이 무겁게 느껴지시나요? 한편으론 그렇기도 하실 겁니다. 그만큼 죄라는 실재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이 경험하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 파스카 하는 삶의 큰 걸림돌이 되죠. 하지만 죄 앞에서 막연히 실망하고 스스로를 탓하며 움츠려있기보다는 죄라는 것이 무엇인지, 자꾸 죄를 짓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과정이 어떤지를 더 구체적으로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럼으로써 보다 효과적으로 죄와 맞서 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사욕이 왜 자리하고 있는지, 원죄 교리에 비추어 이 사욕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지금까지 심리의 차원에서 살펴보았다면, 이제는 우리 영성생활의 측면에서 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시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 죄란 무엇일까요? 아마도 많은 분들이 죄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실 겁니다. 네, 맞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죄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겠습니까?

살아가면서 우리는 종종 하느님의 뜻을 묻곤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을까?’ ‘어떤 것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일까?’ 하면서 말이죠. 때론 삶의 고통 앞에서 하느님께 하소연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왜 이런 고통을 허락하시는지, 내게 무엇을 바라시고 그러시는 것인지를 묻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허락하시고 또 무엇을 허락하지 않으셨을까요?

답하기에 쉽지 않은 복잡한 물음이지만, 아주 단순하게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은 단 한 가지, 바로 우리의 존재 자체라고요.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말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지요.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존재 자체를 허락해 주셨을 뿐, 그 나머지 것은 모두 우리의 자유에 맡겨주셨습니다. 신학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선물로 주신 것이지요. 물론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의지로 그 열매를 먹는 것 자체를 못하도록 억지로 막지는 않으셨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길을 택하고 어떤 행동을 하도록 강제하지 않으십니다. 예를 들어 제가 볼일이 있어서 서울 명동성당에 가야 한다고 생각해 볼까요? 혜화동 신학교에서 명동성당까지 어떤 경로로 가는 것이 하느님의 뜻일까요? 지하철을 타고 가는 것? 택시를 타는 것? 아니면 걸어가는 것? 이 중 ‘어떤 것이 하느님의 뜻일지 찾아봐야지’ 하고서 기도를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라는 말씀을 안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느님께서 제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제가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그리고 되도록 덜 힘들게 잘 가는 것입니다. 여러 다양한 경로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저의 자유에 맡겨주시고 하느님께서는 그저 제가 목적지까지 기쁘게 잘 가기를 바라고 계실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전에 말씀드렸던 것, 기억하세요?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기쁘고 행복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길 바라고 계시고, 이것이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된 구원의 의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들로부터 오는 얕은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참 행복, 그래서 현실의 아픔과 고통도 끌어안을 수 있는 참 기쁨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크고 작은 고통, 어려움들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이러한 세상의 고통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아닌, 인간 스스로의 욕심과 이기심에 뿌리를 두고 자라나는 것들입니다. 인간의 죄로부터 유발되는 결과들인 것이죠. 물론 갑작스럽게 아무런 내 탓 없이 주어지는 고통도 있지만 그러한 고통 역시도 ‘사회적 죄’라는 죄의 전체적인 구조들로부터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결국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뜻은 한 가지, 우리가 이 세상을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죄라고 한다면, 죄의 또 다른 의미는 바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지금 이 순간을 기쁘게 살지 못하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계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계명들이 있고 이를 지키지 않았을 때 우리는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지만, 이러한 모든 계명들은 우리들 자신을 위해서 주어져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평화롭고 기쁘게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서 주어져 있는 도움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시기하거나 미워할 때, 우리 스스로의 마음도 평화롭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나중심성’을 따라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행동을 했을 때도 역시 우리의 마음은 평화롭지 않습니다. 이는 몸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죠. 좋아하는 음식이 있어 지나치게 과식을 하거나 아니면 과음을 해서 다음날 몸이 힘들다면,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죄란 단순히 계명이나 어떤 행위 자체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러한 생각이나 말, 행위 등을 통해서 내가 오늘 하루, 이 순간을 기쁘게 지내지 못했고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속상하게 해드리는 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오늘 하루를 기쁘게 살기 원하시는데, 나의 생각이든 말이든 행위 때문에 내 마음이 불편하고 힘들어하는 것. 그래서 속상해하시는 하느님께 ‘하느님, 당신 원하시는 대로 제가 기쁘게 행복하게 지내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죄 고백이고, 그럴 때에만이 고해성사가 화해의 성사, 치유의 성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자기지향성이나 어린 시절의 환경에 대한 이해만으로 죄의 문제를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심리나 영성생활의 관점에서 죄라는 실재를 다양하게 이해함으로써 죄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구체적인 도움들은 더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죄를 통한 악의 세력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떼어놓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그 무엇도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로마 8,31-39 참조)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