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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기조종사의 병영일기] 여행은 언제 가나요!

이연세 (요셉) 대령 rn육군 항공작전사령부
입력일 2017-08-29 수정일 2017-08-29 발행일 2017-09-03 제 3060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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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부로 군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여행을 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여행 일정을 확정하고 숙소 예약까지 마쳤는데 부대와 가정 사정으로 취소할 수밖에 없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2010년 11월 23일, 처음으로 가족 해외여행을 꿈꾸며 설레는 마음으로 여권을 찾으러 구청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래서 간부들 사이에서는 여행을 가려면 ‘정은이에게 물어봐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습니다.

청춘을 바쳤던 군생활이 저물어가는 요즘, 조금은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딸이 종강하면 해외여행은 몰라도 동해안으로 가족 여행을 떠납시다. 이번에는 모든 일 제쳐놓고 꼭 갈게요. 모든 준비는 내가 할 테니까 따라만 오세요”라고 장담했습니다. 아내는 피식 웃으며 “그래요. 이번에 한 번 더 속아볼까요”라고 맞장구를 쳤지요.

그리고 그동안 실망시켰던 것을 이번 기회에 한 방에 만회하겠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욕심내지 말고 그냥 1박2일로 바람이나 쐬고 옵시다”라고 말했지만, “최소 2박3일은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구경하고 싶은 여행 코스를 결정하고 숙소를 예약하고 시간계획을 작성하고, 인터넷에서 맛집을 검색하는 등 꼼꼼하게 여행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5월 말, 예기치 않게도 구순을 바라보는 부친이 병원에 입원을 하셨습니다. 밤에 화장실에 가다가 주저앉으면서 고관절이 부러지는 중상을 당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부상 소식을 접하며 걱정은 했지만 노인들의 부상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노인들에게 ‘고관절 부상은 곧 침대 신세를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물론 아내와의 약속은 이번에도 공수표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가족뿐만 아니라 하느님과도 수많은 약속을 했습니다. 세례를 받은 그 순간부터 십계명을 외우고 아침저녁으로 주모경을 바치고 주일 미사에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하느님과 쉴 새 없이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서면 세속의 유혹에 정신이 팔려 하느님과의 약속은 까맣게 잊어버리기 일쑤였습니다.

또한 진급이나 아들딸의 대학입시 같은 중요한 일이나, 가정사에 어려움이 닥치면 ‘이번에 은총을 주시면 뭘 하겠다’고 간절하게 청원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막상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하느님과의 약속은 기억조차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하느님은 때로는 자애로운 마음으로, 때로는 안타까운 눈으로, 때로는 성난 표정으로 저의 이런 행동을 넌지시 바라보실 것만 같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마태 6,7)”고 하셨습니다. 좋으신 하느님 말씀이 약속과 계명을 지키지 못한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오늘도 아내는 식사를 하며 “여보! 여행은 언제 가나요?”라고 놀려댑니다.

이연세 (요셉) 대령 rn육군 항공작전사령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