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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종장교전우회’ 김용준 실장, ‘초창기 군사목 역사’ 다룬 논문 발표 눈길

박지순 기자
입력일 2017-08-29 수정일 2017-08-29 발행일 2017-09-03 제 3060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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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보수 촉탁 문관’으로 시작된 군종신부 활동 조명
「군종제도 창설을 전후한…」
교회와 군 자료 면밀히 분석, 군종신부 선발·활약상 등 정리

김용준 ‘갑종장교전우회’ 행정실장이 8월 26일 오후 서울 저동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군종제도 창설을 전후한 군종신부의 활동-육군을 중심으로’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군사목 초창기 역사를 다룬 논문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1969년 임관한 예비역 육군 장교 김용준(바실리오·71·서울 도봉동본당) ‘갑종장교전우회’ 행정실장은 8월 26일 오후 서울 저동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군종제도 창설을 전후한 군종신부의 활동-육군을 중심으로’를 발표했다. 이 논문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부설 한국교회사아카데미가 지난해 말 발간한 「한국교회사아카데미 논총 1」에 수록된 것으로 군사목 전개과정을 조명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연구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발표회를 주관한 한국교회사연구동인회 조한서(사도 요한) 회장은 “한국교회사연구동인회가 교회사 연구자들을 초청해 꾸준히 발표회를 열어 왔지만 군종교구사를 발표 주제로 삼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의미 있는 논문을 소수만 알고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발표회 자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발표회에는 한국교회사연구동인회 회원들과 교회사에 관심 있는 신자 등 50여 명이 참석해 발표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논문은 군종교구 발행 「천주교 군종교구사(군사목 50년사)」를 기초 자료로 삼고 1950년 전후 국방부와 육군본부 등에서 나온 군자료를 면밀히 분석해 군종신부의 선발, 입대 동기, 의식주 생활과 활약상, 군 내 신분변화 등을 설명하고 있다.

초기 군사목 역사와 활동상을 보여줄 논문의 주요내용을 요약 소개한다.

■ 군종신부 선발

1950년 6·25전쟁이 나고 1951년 2월 7일 육군본부 인사국에 군승과가 설치되면서 군종제도가 창립됐다. 2월 7일은 오늘날까지 군종병과 창립기념일로 지켜지고 있다. 1951년 2월 28일 조인원·임세빈·최익철 신부 등 서울대교구 신부 8명, 김후성 신부 등 전주교구 신부 3명이 군종 제1기로 입대했다. 군종 1기에 목사 29명이 있었다. 군종 제2기생 신부 7명은 1951년 5월 1일, 군종 제3기생 신부 3명은 1951년 10월 1일 차례로 입대하게 된다.

초창기 군종신부들의 입대 동기는 주교 명령과 선배 군종신부의 권유 등 비자발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 군종신부들의 의식주 생활과 활약상

초창기 군종신부들은 입대는 했지만 군대 계급은 없는 ‘무보수 촉탁 문관’이었다. 피복과 식량은 군부대에서 제공하고 그 밖의 모든 활동 경비와 물품은 종단 측에서 부담했다. 교회에서 지급하는 보조비로 군종활동을 전개했고 미8군에서 미사주와 일부 보급품을 보조하는 정도였다.

군종 제1~2기 군종신부들의 부임지 현황을 보면 육군본부(조인원 신부)와 헌병사령부(임세빈 신부) 등 지휘부와 6사단(박성춘 신부), 1사단(김후성 신부) 등 전방사단 외에 제3육군병원(구전회 신부), 제23육군병원(이계광 신부) 등 군병원인 경우가 다수 발견된다. 군장병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군종신부 수로 인해 1명의 군종신부는 본래 소임지 말고도 인근 여러 부대를 찾아다니며 미사 봉헌과 부상장병 위로, 고충상담을 맡았다. 차가 없어 수십 리를 걸어다니기 일쑤였다.

■ 군종신부의 신분 변화

계급장을 부여받지 못하던 군종신부들은 ‘무보수 촉탁 문관’에서 6·25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 12월 13일 현역계급을 받는다. 이때 육군에서 신부는 3명만이 임관한 데 비해 개신교 목사는 무려 132명이 임관해 대조를 이뤘다.

신학생들과 본당 전교회장 등이 민간인 신분으로 군종신부들의 군사목을 도왔던 ‘보조군목’도 초창기 군사목 역사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담당했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