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에 돌아볼 만한 순교자 현양의 중심지 1846년 김대건 성인 묻혔던 땅 유해는 전국 성당 등에 분배됐지만 순교자 현양대회는 해마다 열려
순교자성월을 맞아 많은 신자들이 성지를 순례한다. 한국교회는 순교자의 삶과 신앙을 기억할 수 있는 장소를 성지로 선포하고 있다. 신자들이 성지순례를 통해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스스로 신앙을 돌아보며 성숙해 질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다. 교구 성지 중에서도 순례지로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미리내성지 김대건 신부 묘소를 찾았다.
굽이굽이 이어진 산길을 올라 미리내성지 입구에 다다랐다. 성지 주변은 산속에 파묻힌 듯 푸른빛으로 가득하다. 미리내 교우촌의 신자들이 1907년 손수 세운 성요셉성당을 지나 묵주기도의 각 신비를 새긴 조각을 따라 묵주기도를 바치다보면, 아름답게 정돈된 성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 중에도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기념성당의 웅장함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미리내성지가 특별한 이유는 아름답게 조성됐기 때문도, 웅장한 성당이나 건축물이 있기 때문도 아니다. 바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사제가 된 성 김대건 신부가 이곳에 묻혀있기 때문이다. 성지입구에서 800m가량 걸어 들어가자 김대건 성인의 성상이 나타났다. 김대건 성인이 미리내에 묻힌 것은 1846년의 일이다. 1846년 9월 16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인의 시신을 10월 26일 미리내 교우촌의 이민식(빈첸시오)과 몇몇 신자들이 새남터 백사장에서 찾아냈다. 이들은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낮에는 숨고 밤에만 이동하면서 10월 30일 미리내로 시신을 옮겨왔다. 이때부터 미리내 교우촌 신자들은 박해 속에서도 성인의 묘소를 지켜왔다.경당 앞에는 김대건 성인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사실 묘소에는 형체가 남아있는 유해는 없다. 미리내의 신자들이 지켜오던 성인의 유해는 1901년 5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성당으로 옮겨졌고, 이후 전국 성당과 성지에 분배됐다. 하지만 50여 년 이곳에 묻히면서 진토가 된 잔재는 이 자리에 남아있다. 마치 성인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지만, 이곳을 통해 그 정신이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과 같다. 묘소 앞에서 성인이 옥중에서 쓴 마지막 편지를 읽고 묵상했다.
“세상 온갖 일은 주님의 뜻 아닌 것이 없고(莫非主命), 주님께서 내리신 상이나 벌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莫非主賞罰).… 큰 사랑을 이루어 한몸같이 주님을 섬기다가, 죽은 후에 한가지로 영원히 하느님 앞에서 만나, 길이 영복을 누리기를 천번 만번 바랍니다.”(김대건 신부의 옥중 서한 ‘교우들 보아라’ 중)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