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죄 이야기-원죄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
입력일 2017-08-22 수정일 2017-08-22 발행일 2017-08-27 제 3059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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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는 성장 과정에서 물려받은 사욕
인간은 죄지은 몸으로 태어나
죄로 기우는 근본 경향 지녀

찬미 예수님.

지난주에 우리를 자꾸 죄로 기울어지게 하는 사욕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사욕과 관련해서 어려운 것은 우리가 우리 안에서 움직이는 사욕을 쉽게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우리 안에 사욕이 일어나 어떤 죄를 짓도록 부추긴다고 할 때, ‘아, 지금 내 안에 사욕이 일어나고 있구나.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지’ 하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사욕은 우리의 유전적 기질과 더불어, 우리 각자가 자라온 환경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로마에서 공부할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아침 학교에 가려고 버스를 탔는데 유모차에 앉아 있는 한 여자아이에게 시선이 갔습니다. 서너 살쯤 되었을까요? 굉장히 예쁜 아이였죠. 그런데 그 표정을 보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린아이의 표정치고는 너무나 침울한 얼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옆에서 저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죠. 살짝 고개를 돌려보니 대여섯 살 돼 보이는, 그 아이의 언니인 듯한 아이가 저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낯선 사람이 자기 동생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언니도 동생과 마찬가지로 참 예쁘게 생긴 아이였는데 그 표정 역시도 동생만큼이나 침울하더군요. ‘아니, 도대체 어떻게 된 집안이기에 아이들 표정이 다 이럴까?’ 그제야 가족 전체를 바라보니 젊은 부부가, 아빠는 유모차를 그리고 엄마는 큰아이 손을 잡고 서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상적이었던 것은, 엄마가 큰아이의 손을 잡고만 있다뿐이지 몸은 완전히 반대로 돌려서 창밖 풍경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손을 안 잡고 있다면 완전히 남남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모습이었습니다.

젊은 엄마가 참 냉정한 사람인가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남편이 아내를 부르자 고개를 돌려 이야기하는데 활짝 웃는 표정이 참 사랑스러운 얼굴이었죠. 하지만 남편과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그 아내는 다시금 얼굴을 굳히면서 여지없이 창밖을 향해 돌아섰습니다. 잠시 후, 버스 안에 빈자리가 났지요. 동생처럼 어디 앉고 싶었는지 아이는 엄마에게 자리에 가서 앉자고 졸랐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아이의 손을 확 낚아채면서 ‘곧 내리니까 앉을 필요 없다’고 단박에 잘라 말했습니다. 계속 앉고 싶었던 언니는 아빠에게 졸랐고, 남편은 아내에게 유모차를 맡기고는 아이와 함께 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물론 곧 종점에 도착해서 다들 내려야 했지요.

저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참 씁쓸했습니다. 앞날을 알 수는 없지만, 저렇게 자란 아이들이 과연 커서 사랑을 느끼며 살 수 있을까, 이 세상이 서로 사랑하며 살만한 곳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을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모를 일이지만, 그 아이들이 자라면 삶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보다는 부정적인 느낌을 더 많이 갖게 되지 않을까요? 사랑으로 기쁨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기보다는 신경질과 짜증으로, 잦은 불평과 분노로 어려움을 많이 겪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 아이들이 만일 관계 안에서 시기나 질투, 분노, 언쟁 등으로 인해 ‘죄’를 짓게 된다면 그 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분명 사욕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욕은 아이들이 원해서 갖게 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자라온 가정환경 안에서 저도 모르게 형성된 기질이나 성격에 함께 묻어있습니다. 때문에 아이들 스스로도 이를 자신의 사욕이라고 알아차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이 그렇게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된다고 할 때,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아마도 먼저 떠오르는 것은 딸에게 그렇게나 냉랭했던 젊은 엄마일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 엄마도 어린 시절 그런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고 한다면 어떨까요? 나쁜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엄마는 으레 그런 사람으로 알고 자라서 그런 것이라면? 그럼 그 책임은 이 젊은 엄마의 부모님에게 돌릴 수 있겠죠. 그런데 그 부모님도 또 다들 그런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 것이라면? 이를 계속해서 거슬러 올라가면, 아마도 우리는 아담과 하와에게까지 닿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원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물론 원죄의 신학적 의미도 따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심리적인 차원에서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원죄의 결과로 주어지는 사욕을 우리들이 자기 탓 없이 물려받게 되는, 곧 내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어린 시절의 환경으로 인해 이미 내 안에 형성되어 있는 어떤 부정적인 기질이나 성격적인 약함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리처드 로어 신부님의 글 하나를 소개해드립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라는 사이트에 ‘어린이처럼 되어야’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예수는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이어서 어린이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알아볼 수 없다고 하신다. 이 말씀의 가장 합리적인 해석은 우리 모두 부족함이 충분하게 채워지지 않는 가정 환경, 어느 정도 어둡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음을 인정할 때 가능하다.

우리 모두 죄지은 몸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원죄 교리다. 우리 모두 상처를 안고 있다. 아버지한테서 아들로, 어머니한테서 딸로, 우리는 그 상처를 물려주고 물려받았다.

언제고 우리는 저마다 자기 가족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거기서 우리의 두려움에 다시 이름 붙이고, 억압된 감정들을 다시 느끼고, 그동안 느끼고 생각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것들을 다시 느끼고 다시 생각하고 다시 소유하고 다시 살아 내야만 한다.

그것이 진실로 어린이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 당신은 스스로 바보가 되는 느낌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린이가 되어 그 여정을 다시 밟고 다시 걷지 않는 한, 당신은 언제까지나 상처 입은 아이를 품에 안고 보살펴 주어야 할 것이다.”

원죄 교리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아니지만 심리적 차원에서 충분히 공감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원죄의 결과로 주어진 사욕 때문이든 아니면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통해 저절로 형성된 모습 때문이든, 결국 우리 모두는 죄로 기울게 되는 근본적인 경향성을 우리 안에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자꾸만 나 중심으로 움직이려는 경향, 죄로 기울게 하는 사욕이 우리 안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슬퍼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지닌 기본 조건이니까요. 그게 ‘나’임을 받아들이면 되는 일입니다.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