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방주의 창] 강한 의지와 확고한 결심만으로는… / 하종은

하종은(테오도시오) 카프성모병원 알코올치료센터장
입력일 2017-08-22 수정일 2017-08-22 발행일 2017-08-27 제 3059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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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의지가 중요한 것 아닙니까? 병원 치료는 하지 않겠습니다. 제 힘으로 술을 끊도록 하겠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진료실을 찾은 한 알코올 중독자가 결의에 찬 단주 결심을 공표했다. 정작 가족들의 표정은 어둡기만 하다. 이미 여러 차례 들어온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중독자의 이런 단호한 표현 뒤에는 의료적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고집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술을 끊고 온전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오해하며 시간 낭비를 하는 중독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와 달리, 프랑스 예수회 소속 뤼시엥 뒤발 신부는 철저하게 다른 길을 택했다. 그는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으로 샹송 작곡가, 연주자, 가수로 활동했다. 유럽뿐 아니라 북미 지역을 순회하며 하느님을 찬양했고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러나 명예에 대한 책임감과 심한 불면증으로 뒤발 신부는 술이라는 헛된 위로를 찾았고 그로 인해 결국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50세 무렵 술을 마시다 병원에 실려 갈 지경에 이르러서야 그는 혼자서 술 문제를 해결해보려던 발버둥이 무의미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용기도 아무 소용이 없노라. 의지도 아무 소용이 없노라. 자신에 대한 힘도 아무 소용이 없노라. 자신에 대한 미움도 아무 소용이 없노라. 격려도 아무 소용이 없노라. 지식도 아무 소용이 없노라. 재산도 아무 소용이 없노라. 영광도 아무 소용이 없노라. 학문도 아무 소용이 없노라. 자격증과 학위도 아무 소용이 없노라. 기도, 나는 애썼으나 소용이 없노라.’

완전한 패배를 시인하는 바로 그 절망의 순간에 희망이 되살아났다. 독선과 고집을 내려놓자 자신의 삶을 지배해왔던 중독의 허울 또한 벗어던질 수 있었다. 비로소 회복을 향한 타인의 도움을 수용하고 모든 것을 치료에 투자할 용기 또한 낼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 결과 꾸준한 의료적 치료와 같은 처지의 중독자 모임에 참여한 끝에 뒤발 신부는 마침내 회복에 성공했다. 이후 그는 많은 알코올 중독자들의 회복을 도왔으며 그들에게 희망이 되는 삶을 몸소 살았다.

많은 사람들이 중독을 의지의 탓으로 돌린다. 의지가 약해서 술을 끊지 못하고, 의지가 약해서 다시 도박에 손을 대고, 의지가 약해서 약물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라고 흔히들 오해한다. 때로는 “얼마나 의지가 없으면 네 행동 하나 조절하지 못하고 의사를 찾고 약을 먹느냐!”며 힐난 섞인 질책으로 의료적 치료를 가로막는다. 이런 몰이해와 왜곡된 인식이 중독자들을 더욱 음지로 몰아넣는다. 중독이라는 질병은 의지의 탓이 아니다. 역으로 중독에 빠지면 의지를 발휘하기가 어렵게 된다. 제아무리 지혜롭던 사람도 중독에 빠지면 술 마실 이유를 매 순간 찾고, 약물에 의지하며, 도박에 인생을 건다. 중독성 사고가 무서운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생각 속에 깊이 자리한 피해의식이 다른 이를 탓하게 하고, 내면의 분노가 조절되지 않으며 서슴지 않고 폭력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더욱이 주변 사람들은 이러한 질병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병자와 다투고 서로를 미워하고 원망하며 급기야 치료를 포기하기도 한다.

중독 분야의 치료자들은 유독 심리적인 ‘밑바닥’을 강조한다. 절망이 최악에 이르는 시점이 바로 희망이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본인이 절벽에 매달려있는 신세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간절히 도움을 청할 뿐만 아니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온전히 살기 위해 총력을 쏟는다. 사실 중독은 어느 정도 치료 방법이 정립되어 있다. 효과가 있는 약이 개발되었고, 치료프로그램이나 재활시스템도 잘 갖추어져 있다. 다만 편견과 오해가 회복의 길에 들어서는 것을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마귀 들린 딸을 둔 가나안 여인은 주님께 간청하며 매달린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예수님은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며 기적을 행하신다.(마태 15:21-28) 간절하고 절박한 청이야말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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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은(테오도시오) 카프성모병원 알코올치료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