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섬이는…
신유박해로 가족 잃고
9살에 홀로 거제도 유배
평생 동정 지키며 살아
유섬이는 복자 유항검(柳恒儉·아우구스티노)과 순교자 신희(申喜)의 딸로 1793년 초남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유섬이가 3살 무렵인 1795년 한국천주교회 최초 선교사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유항검의 집을 방문했고 일주일간 머무르며 인근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한다. 배기현 주교는 “유섬이의 세례명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때 주 신부에게 세례받았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유항검 일가는 순교하거나 유배를 가게 된다. 가족을 잃고 먼 땅으로 홀로 유배와 관비가 된 9살의 유섬이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하성래(아우구스티노·전 수원교회사연구소 고문) 박사가 거제도호부사를 지낸 하겸락의 문집 「사헌유집」(思軒遺集) 중 ‘부거제’(附巨濟)에 유섬이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한국교회사연구소가 펴내는 「교회와 역사」 2014년 4월호에 상세한 내용을 발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관비로 유배된 유섬이는 바느질로 생계를 꾸리던 여인에게 보내졌고 그 여인은 유섬이를 수양딸로 삼았다. 유섬이는 관아에 돈을 바치기 위해 양모에게 바느질을 배워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13~14세가 된 유섬이는 동정을 지킬 것을 선언한다. 마산교구 평신도협의회 시복시성분과 최종록(대건 안드레아ㆍ창원 사파동본당) 위원장은 “당시 시대상을 생각할 때 여성이 독신 선언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며 “동정부부인 오빠 유중철(요한)과 올케 이순이(루갈다)를 따라 자신도 믿음의 뜻을 세웠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섬이의 동정 결심은 16~17세가 되어 더욱 굳건해진다. 유섬이는 양모에게 흙과 돌로 집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한다. 그것은 독방과 같은 구조였다. 음식을 넣을 구멍과 작은 창만 내어줄 것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양모에게 대소변을 집 안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준비해 달라는 청을 한다. 유섬이는 25년 여 동안 스스로 갇혀 동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40세가 넘어 흙돌집에서 나온 유섬이는 한 자 길이의 칼을 몸에 지니고 동정을 지켰다. 고을 사람들도 그 정절을 알고 ‘유 처자’라 부르며 감히 더럽힐 마음을 갖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동정을 지킨 유섬이는 1863년 71세의 나이로 선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