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바티칸박물관 특별전 지상중계 (2)

최용택 기자
입력일 2017-08-14 수정일 2017-08-16 발행일 2017-08-20 제 3058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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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 속에도 신앙 지킨 선조들 생활상 고스란히

바티칸 특별전은 9월 9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이 주례하는 개막미사로 막이 오른다. 1831년 9월 9일은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조선대목구 설정 소칙서를 반포한 날이다. 한국 땅에 처음으로 독립된 교회가 설정된 기념일, 보편교회의 중심인 바티칸에서 한국교회 230년 역사를 선보인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모두 203점의 유물을 선보인다. 이 유물들을 통해 특별전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 없이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한국교회의 역사를 세계인에게 각인시킬 계기가 될 전망이다. 3막과 4막에서는 학문으로 시작해 신앙으로 발돋움한 한국교회가 받았던 박해의 실상과 박해 속에서도 굳건히 신앙을 지킨 선조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 3막- 습속의 벽에 갇히다: 박해와 순교

조선에 뿌리내린 천주교는 유교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천주교는 하느님을 유일무이한 존재로 모시는데 반해 유교는 임금과 부모를 하늘처럼 여겼다. 인간존중과 평등을 가르치는 천주교는 조선사회의 근간이었던 신분제를 흔들며 구질서를 위협했다. 게다가 조선의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종종 천주교 탄압을 이용했다. 박해는 100년간 이어졌고, 1만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했다.

천주교 박해는 ‘진산사건’으로 시작됐다. 당시 조선에서는 부모상을 당하면 3년 동안 묘소 옆에 기거하며 해마다 부모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치르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1791년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은 교황청이 내린 제사 금지령에 따라 어머니의 신주를 불태웠다. 당시 지배 세력은 이를 국가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윤지충은 참수를 당했다.

진산사건 이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본격화됐다. 개혁군주 정조가 죽은 뒤 실권을 잡은 정순왕후는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천주교 박해령을 내렸다. 이후 전국의 천주교 신자가 색출됐으며 배교를 거부하면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됐다. 1801년을 시작으로 1839년, 1846년, 1866년 네 차례의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났다.

특별전은 박해의 원인을 제공했던 신주, 천주교를 공격하는 유학자들의 주장을 담은 「벽위편」과 「척사론」, 천주교 신자들을 마을에서 쫓아낸다는 의미를 담은 ‘손도패’ 등을 통해 당시 천주교에 적대적이었던 사회상을 보여준다. 신유박해(1801년) 때 문초와 형벌을 받은 신자들의 진술내용을 담은 「징의」,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신앙과 순교사실을 기록한 「기해일기」 등은 박해의 참상을 생생히 느끼게 하는 유물들이다. 박해의 부당함을 호소한 정하상의 「상재상서」도 선보인다.

죽은 사람의 이름과 죽은 날짜를 적은 나무패. 유교 사회인 조선에서는 조상에 대한 도리를 중히 여겼고, 기일과 명절이 되면 상에 음식을 차리고 조상의 혼령이 깃들어 있다고 여기는 신주를 모셔 놓은 다음, 그 앞에서 향을 피우고 절을 했다.

신주

조선 후기 제주도의 ‘서공’이라는 촌락의 관리들이 천주교에 대한 대응책으로 제작한 것. ‘손도’는 지역 사회의 질서를 지키지 않는 이를 그 지역에서 쫓아낸다는 의미로, 마을에서 공동으로 숭배하는 신을 따르지 않는 천주교인들은 동네에서 쫓겨나야 했다.

손도패

■ 4막- 벽을 넘어선 희망

100여 년간 이어진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길고도 가혹했다. 박해가 심해질수록 순교자들 중에 중인과 양인, 천민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당시 박해 상황을 기록한 책에는 “1801년 박해기에 신자의 3분의 2가 여성이었고, 3분의 1이 천민이었다”고 기술돼 있을 정도였다.

실정과 폭압에 시달리던 민중들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이며 만민이 평등하다는 교회의 가르침에 매료됐다. 이들이 죽음으로 신앙을 지킨 이유는, 바로 천주교 안에서 인간다운 삶에 대한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긴 박해와 순교 속에서도 신자들은 사랑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특히 박해로 고향을 떠나게 된 신자들은 인적 드문 산 속에 교우촌을 세우고, 서로를 ‘신앙의 벗’으로 부르며 의지하고 살아갔다. 숯을 굽고, 옹기를 만들며 힘들게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교우촌의 신자들은 하느님 앞에 모두 평등한 존재라는 진리를 실천했다. 어려운 이웃과 부모 잃은 아이들도 함께 돌봤다. 바로 하늘의 뜻을 땅 위에서도 이루려는 노력이었다.

4막에서는 교우촌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엿볼 수 있는 유물들이 전시된다. 특히 여사울과 계촌리, 삽티리, 해미와 골배마실 등 교우촌과 순교자들의 무덤에서 발굴된 십자가와 묵주, 기적의 메달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당시 신자들의 신자생활을 돕던 ‘첨례표’와 초기 신자들이 일상에서 바치던 기도문을 모아 놓은 「천주성교공과」 등도 전시된다. 「가톨릭 선교지」(Les Missions Catholiques)와 리델 주교의 스케치를 통해 당시 신자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 리옹 포교사업후원회(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Faith)가 1868년부터 발행한 기관지로 프랑스에서 선교사를 파견한 각국의 소식들을 자세하게 싣고 있다. 「가톨릭 선교지」에 소개된 이 그림은 ‘조선에서 남녀가 따로 앉아 미사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조선의 신분제 사회 안에서 남녀의 구별이 엄격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가톨릭 선교지

초기 신자들이 일상에서 바치던 기도문을 모아 놓은 책. 기도서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직후부터 존재했는데, 박해시대 때 신자들의 기도생활과 공동체의 결속을 다져 주는 역할을 했다. 자신과 이웃을 위한 기도, 특히 돌아가신 이를 위한 기도가 있어 이웃들에게 많은 위로가 됐다.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소장

천주성교공과

첨례표는 교회에서 기념해야 할 대축일, 축일, 기념일 등을 날짜순으로 기록한 한 장 짜리 축일표로, 박해 시기 신자들의 실질적인 신앙생활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일반 달력과 달리 예수의 탄생, 죽음, 부활, 승천 등 그리스도의 삶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소장

병인년첨례표

리델 주교가 그린 충청도 지방 교우촌에 살고 있는 열세 살 소년. 이 댕기머리 소년은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신앙을 고백해 주위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리델 주교는 조선 신자들의 모습을 여러 장의 그림으로 남겼다.

소년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